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 출연한 배우 정성일. 넷플릭스 제공
‘유재석 닮은꼴’, ‘한국의 양조위’에다 ‘나이스한 개××’까지.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 출연 이후 배우 정성일(43) 앞에는 수식어들이 넘쳐난다. 그만큼 이 드라마로 전에 없던 주목을 받았다는 증거이자 훈장이기도 하다. 특히 김은숙 작가가 언급한 “나이스한 개××”는 정성일이 연기한 하도영에 대한 한줄 설명으로 화제를 모았다.
“작가님 얘기 듣고 속으로 ‘나이스한 거면 나이스한 거지, 개××는 뭐지?’ 했어요. 그 양면성을 찾으려 노력했고, 시간도 좀 걸렸죠.”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성일이 말했다. 그는 도영이 운전기사에게 와인을 버리듯이 주는 장면에서 양면성을 잘 드러낼 수 있었다고 했다. 얼결에 최고급 와인을 받은 기사가 “저는 와인 맛을 잘 모른다”고 하자 도영은 “집에 가는 길에 1만원짜리 와인을 사라. 그걸 마신 다음 이걸 마시면 알게 될 것”이라고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조언을 한다. “도영이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닌데 (유복하게) 자라온 환경에서 몸에 밴 것들이 묻어나는 거죠.”
도영은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 힘든 인물이다. 아내 연진(임지연)의 편인지, 아내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벼리는 동은(송혜교)의 편인지, 흐릿한 경계 사이를 오간다. 드라마가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하는 그 모호함을 정성일은 무표정 속의 섬세한 얼굴 근육 떨림으로 표현해낸다. 2002년 데뷔 이후 오랜 무명 시절을 견뎌온 배우를 재발견하게 된 순간이다.
정성일은 김은숙 작가의 캐스팅 낙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다고 했다. 작가와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첫 대본 리딩을 하고 나서도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에 매니저에게 “나 잘릴 수도 있을 것 같아”라고 했단다. “늘 불안했어요. 그래서 캐릭터 연구를 미친 듯이 했죠. 답이 잘 안 나와서 감독님과 작가님 찾아가 피드백을 얻으려고 애 많이 썼어요. 그렇게 답을 조금씩 찾아갔죠.”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 출연한 배우 정성일. 넷플릭스 제공
날카롭고 예민한 도영을 표현하기 위해 살을 좀 뺐으면 좋겠다는 제작진의 제안에 4㎏ 감량하고 촬영장에 갔더니 다들 “왜 이렇게 많이 뺐냐?”며 놀랐다고 했다. 얼굴이 유독 핼쑥해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 살이 빠지면서 ‘유재석 닮은꼴’이란 별명을 얻었고, 지난달 초 유재석이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tvN)에도 출연하게 됐다.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저와 유재석씨 얼굴을 반반씩 섞은 사진을 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기도 했죠.(웃음)”
정성일은 <유 퀴즈…>에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고된 무명 시절을 떠올렸다. 몸이 아파 멀리서 요양해야 했던 어머니 대신 자신을 키워준 두살 위 누나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누나는 <더 글로리>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누나가 무뚝뚝해요. ‘잘 봤다. 건강 잘 챙겨라’ 이 말만 하더라고요. 그런데 누나 얼굴 보면 저는 알아요. 누나가 이제 마음을 놓고, 동생 걱정 덜 하고, 뿌듯해하는구나 하는 걸요.”
그는 작정한 듯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유 퀴즈> 나가고 나서 엄마가 좀 속상해하셨어요. 방송에 누나 얘기만 나오면서 엄마는 애들을 버린 것처럼만 나왔다고요. 제가 고3 때 엄마가 힘겹게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와서는 너무 미안해하며 우리 남매를 죽을 힘을 다해 돌봐주셨거든요. ‘성일아, 누가 안 봐도 먼저 청소하고, 그걸 티내지 않아도 열심히 살면 누군가는 널 알아볼 거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신 분이 엄마예요.” 생계를 위해 신문·우유 배달, 빌딩 청소, 주차 대행 등 일을 하며 무명 시절을 버텨온 그는 “뭐든 열심히 한 것도 다 엄마 영향이었다”며 “엄마는 요즘 제가 이렇게 된 걸 너무 좋아하신다”고 했다.
정성일은 요새 자신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부쩍 실감하는 중이다. “길에서 알아보시는 분들도 많고, 여기저기서 연락도 많이 온다”고 했다. “감사한 마음이 크죠. 열심히 하긴 했어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늘 불안해하는 게 있어요. 지금의 관심과 이슈도 금방 사라질 거라는 걸 알아요. 다만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연기 바탕인 무대로 돌아가 활약하고 있다. 연극 <뷰티풀 선데이>(4월2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와 뮤지컬 <인터뷰>(5월28일까지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 출연 중이다. “저에게 무대는 기본으로 돌아가 에너지를 채우고 공부하는 보금자리”라고 그는 설명했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요. 외모적으로 잘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외모보다는 진짜 연기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할 겁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