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오른쪽 사진)에게 공감했다면 애초 학교 폭력을 막을 근본적인 대안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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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못난 아들 뒷바라지하며 살아오신 어머니와 생계를 꾸리는 엄마를 대신해서 저를 돌봐주신 할머님을 생각하여 용기 내어 공개적인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잘못과 부족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과거를 반성하고 보다 나은 사람으로 변화하며 살아갈 기회를 저에게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기억하시는 많은 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 제 과거의 부족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다시 얻은 노래하는 삶을 통해서 사회의 좋은 구성원이 되어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호소는 먹히지 않았다. <엠비엔>(MBN)의 <불타는 트롯맨> 결승전에 진출한 황영웅은, 그가 학생 시절 학교 폭력 가해자였으며 상해 전과자, 데이트 폭력 가해자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논란에도 생방송 결승전 1차전 출연을 강행했던 황영웅은 끝내 논란을 넘지 못하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생방송 결승전 무대를 앞두고 “본인의 부족함과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깊이 사죄드린다”며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온갖 흉흉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방황’으로 치부하는 태도부터,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제 가족을 끌고 들어오는 태도까지 모든 게 문제가 됐다. <티브이(TV) 조선>의 <미스터 트롯> 제작진이 투입돼 새로 써내려가고 싶었던 흥행 신화의 피날레는, 이처럼 오디션 프로그램 사상 초유의 ‘결승전 도중하차’라는 기록으로 얼룩졌다.
대중 분노가 폭발하는 지점은 어디?
비슷한 시기,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던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정아무개씨가 고등학생 신분이던 2017년 동급생에게 8개월 동안 언어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진학한 정씨가 기숙사 방을 같이 쓰는 동급생에게 “좌파 빨갱이”, “제주도에서 온 돼지”, “더러우니까 꺼져라” 따위의 언어폭력을 지속적으로 가하는가 하면, “아빠는 (검사여서) 아는 사람이 많다”는 식의 언사로 제 위세를 떨쳤다는 것이다. 피해 학생은 정씨와 마주칠 때마다 극심한 불안 등의 트라우마 증상을 보이다가 자살 시도를 하는 등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어려워졌다.
2018년,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는 정씨에게 강제전학 처분을 내렸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학교 쪽 판단이었다. 그러나 당시 검사 신분이었던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 정씨의 강제전학 처분이 지나치다며 재심과 행정소송,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등의 법적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1년여간 재심과 불복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정씨는 꾸준히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 신분을 유지하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3학년이 되기 직전인 2019년 2월에야 전학을 간 뒤 2020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다. 이와 같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순신 변호사는 국가수사본부장 임명 하루 만에 사퇴해야 했다.
학교 폭력을 좀 더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는 공감대는 갈수록 더 강해지고 있다. 황영웅이나 정씨의 사례 이전에도, 연예계에서는 학교 폭력 전력이 있는 연예인들이 퇴출되는 사례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배우 지수,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멤버 수진 등이 학교 폭력 논란 끝에 연예계에서 퇴출되었다. 관련 의혹이 제기된 수많은 연예인들은,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의혹이 사실무근임을 증명하거나 혹은 피해자와 원만한 합의점을 찾는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다 예민한 시기인 성장기 청소년들을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분노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을 보면 다소 갸우뚱하다. 언론이 황영웅의 과거를 더 크게 비난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우승상금 6억원’짜리 결승전 출전을 감행하면서였고, 정씨의 과거가 더 크게 비난받은 건 그가 한국 학벌 피라미드의 정점인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였다. 분노가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에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폭력을 가하고도 잘 살 수 있는가’에서 폭발하는 것이다.
‘유명인의 학폭’ 문제에서 놓친 본질
물론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피해자는 아직도 트라우마를 다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가해자는 두 다리 뻗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니까. 하지만 황영웅이나 정씨에게 제기된 혐의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회적 성취를 거두었는가와 무관하게 심각한 일이다. 예컨대 황영웅이 예선에서 탈락했다고 해서 덜 분노할 일도 아니고, 정씨가 학벌 자본을 손에 얻지 못했다고 해서 덜 분노할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승상금 6억원’, ‘서울대학교 철학과’라는 타이틀 앞에서 더 크게, 더 원색적으로 분노한다.
이처럼 가해자가 사후에 얻게 될 사회적 타이틀 앞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고 그것을 박탈하자는 지점에서 멈추는 분노는, 불행히도 학교 폭력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다. 우선 이 모든 논의는 ‘학교 폭력에 대한 정당한 처벌에 실패한 이후 사후적으로 벌어지는 보완 조치’에 그친다. 학교 폭력을 과거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해야 할 시간에, ‘가해자를 어떻게 사후적으로라도 처벌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학교 폭력을 막을 수 있는 대안에 관한 논의뿐 아니라,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하고 보호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 또한 지연시킨다.
혹자는 ‘학교 폭력의 전력이 있는 사람은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 되어도 단번에 퇴출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학교 폭력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자체로는 흔쾌히 동의할 만한 지적이다. 그러나 연예계 퇴출이나 명문대학교 입학 취소 등에만 초점이 맞춰진 분노는, 그 외의 다른 가해자들을 감추는 효과가 있다. 사회적으로 덜 주목받는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혹은 학벌 자본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의 학교 폭력 가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런 방식의 분노가 “어차피 세상이 주목할 만한 일을 할 생각은 없는” 평범한 학생들의 폭력까지도 예방할 수 있을까?
아울러 분노가 여기에서만 그친다면, 학교 폭력 문제의 해결을 막는 재력, 학벌, 유명세, 인맥 중심의 권력 구조는 오히려 더 강조될 것이다. 우승상금 6억을 타지 못하고 데뷔를 못하게 되었으니 된 거라면, 혹은 서울대학교 입학 취소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된 거라면, 뒤집어 생각하면 돈의 위력과 학벌의 위력을 고스란히 인정해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법과 제도를 통해 외부적인 위력을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기에, ‘우승상금 6억’이나 ‘서울대학교’에 집착하는 논의는 오히려 돈과 학벌의 상징성을 더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수의 언론부터 세간의 장삼이사까지, 입 있는 사람들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2022~2023)를 언급하며 학교 폭력 가해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더 글로리>의 내용을 가만 곱씹어보면 지금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인가 싶다. <더 글로리>는 당장 벌어지고 있는 학교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피해자가, 제 인생의 절반을 통째로 바쳐서 사후적으로나마 정의를 구현하겠다며 복수를 꾀하는 내용이다.
<더 글로리>를 보며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의 아픔에 공감했다면, 지금 중요한 건 ‘가해자를 어떻게 사후적으로 처벌할 것인가’에서 그치는 논의가 아니라 ‘지금 발생하는 피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여야 하는 게 아닐까? 서른여섯 문동은의 복수를 응원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주변에 있을 열여덟의 문동은을 구할 생각을 해야 한다.
<덧>
2013년 3월15일 첫 연재를 시작했던 ‘술탄 오브 더 티브이’가 어느덧 10주년이 되었습니다. 대중문화계를 수놓은 수많은 얼굴과 이름들에 관해, 대중문화계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 현안에 관해, 방송과 언론에 반영된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해 제 나름대로 떠들어댄 세월이 벌써 10년이라니, 돌아보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10년간 써온 글들을 다시 돌아보면 어떤 글들은 창피해서 지워버리고 싶기도 하고, 어떤 글들은 사안에 관해 판단을 너무 쉽게 내렸던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럽기도 합니다. 어떻게 10년이나 이 지면을 지킬 수 있었는지 모를 노릇인데요. 사실 그 모든 게 이렇게 부족하고 모난 글을 10년이나 아껴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덕분임을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승한의 몰아보기’에서부터 셈하면 <한겨레S> 창간부터 지금까지, 갑상선 수술로 쉬었던 한차례를 제외하면 11년을 개근했습니다. 토요일마다 독자 여러분을 만나는 일은 기쁜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글이란 것은 신기해서, 쓰면 쓸수록 저의 부족함이 더 잘 드러나니까요. 해서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연재 10주년을 맞이해 약 두달 동안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숨을 돌리면서 서툴게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더 잘 걷기 위해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모두들 찬란한 봄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