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12일(현지시각)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여우주연상의 향배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미셸 여(양자경)가 받으면 아시아 배우 최초의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된다. 미셸 여는 지난달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청신호를 켰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경쟁자가 있다. <타르>(22일 개봉)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골든글로브(드라마 부문), 크리틱스 초이스, 영국 아카데미 등에서 차곡차곡 트로피를 모으고 있는 케이트 블란쳇이다. 블란쳇이 메릴 스트립,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함께 ‘저세상 연기’를 펼치는 할리우드 최고의 여성 배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다. 이번에 수상하면 앞의 두 배우와 똑같이 세번째 오스카(2005년 <에비에이터> 여우조연상, 2014년 <블루 재스민> 여우주연상)를 거머쥐게 된다. 현존 여성 배우 최고의 기록이다. 게다가 <타르>는 블란쳇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배우의 전매특허인 ‘우아함’이 파멸적인 상황에서도 놀라운 정도로 유려하게 펼쳐진다.
영화에서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베를린필하모닉 14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상임지휘자가 된 인물. 물론 영화적 설정으로, 베를린필은 아직 여성 상임지휘자를 둔 적이 없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봉을 잡고도 30년이 지난 1980년대 들어서야 진통 끝에 여성 연주자에게 문을 열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곳이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면서도 여전히 보수적인 이곳에 여성 상임지휘자가 선임된다는 건 그만큼 역사적인 인물이 탄생한다는 의미로, 타르가 바로 그 인물이다. 긴 설명이 없어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음악적 역량과 카리스마의 소유자인지 미뤄 짐작할 만하다.
영화는 타르가 얼마나 특출나고 어떻게 노력해서 이 자리에 올라갔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객석 앞에서 차분하게 이어지는 타르의 인터뷰, 미국 명문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는 타르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그의 실력과 철학과 야심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낮은 목소리와 눈짓 하나로도 마음을 파고드는 블란쳇의 연기가 수행한다. 말러 교향곡 5번 녹음을 위한 단원들과의 마지막 리허설 장면은 그 자체로 완성된 연주회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타르>는 성공담이 아니라 추락담이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타르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가 관여했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젊은 연주자는 그를 비난하며 자살하고, 수업을 받았던 줄리아드 학생은 그를 인종차별주의자, 반여성주의자로 낙인찍는 동영상을 유포한다. 쌓이는 불안 속에서도 질주를 멈추지 않는 욕망은 그를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타르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치적 행동도 서슴지 않으면서 또 사적인 욕망을 위해 권력을 이용하고 불안 앞에서 점점 더 히스테릭해진다.
이러한 추락의 과정이 꽤나 드라마틱하지만 영화는 자극적 흥미를 유발하는 전형적인 드라마 작법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초상화를 그리듯 타르의 복잡한 속내를 응시한다. 이를 통해 권력의 부패와 타락이라는, 자칫 뻔해질 수 있는 소재가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눌 수 없는 다층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블란쳇의 눈부신 연기가 완성한 작품성이다. 불륜이라는 소재로 미국 백인 중산층의 위선을 까발린 <리틀 칠드런>(2007)으로 주목받았던 토드 필드 연출작으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외에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6개 주요 부문 후보에 올랐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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