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현지시각)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돼 호평받은 <길복순>(넷플릭스)은 변성현 감독의 재능과 배우 전도연의 노련함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영화다. <존 윅>처럼 청부살인 비즈니스 세계라는 비현실적 설정과 사춘기 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엄마라는 현실적인 소재를 연결했음에도 억지스럽거나 거슬리는 장면 없이 관객을 빠져들게 한다. 이를테면 복순(전도연)이 ‘이마트’에서 산 도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액션을 펼칠 때는 변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에 감탄하다가도 아이 문제로 “엄마도 계약기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는 복순의 대사에 덩달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든 극장 개봉작이든 막론하고 시원찮은 장르 영화들이 양산되는 가운데 드물게 꽉 찬 즐거움을 선사하는 액션 스릴러다.
“참 모순이야. 이런 일 하면서 애를 키운다는 게.” 복순은 낮에는 15살 딸에게 이벤트 회사라고 속인 살인청부업체에서 지시받은 살인 ‘업무’를 보고, 퇴근해서는 속을 알 수 없는 딸 때문에 속이 긁히는 ‘평범한’ 엄마다. 살인청부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복순은 회사 대표인 민규(설경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지만 그만큼 업계 동료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한몸에 받는다. 업계 최고인 민규의 회사 역시 경쟁사들의 견제를 받기는 마찬가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킹메이커>(2022) 등 전작에서 끈끈한 브로맨스를 그려내는 데 실력을 발휘했던 변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아예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위한 시나리오를 썼다. 그중에서도 배우이자 실제 딸을 둔 엄마로서 갈등하고 모순된 상황에 처하는 전도연의 모습에 집중해 시나리오를 썼다고
베를린영화제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흔히 엄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가장 모순된 설정으로 ‘킬러’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영화 전반에 불협화음적인 재미를 깔아놓는다. 허름한 술집에서 만난 업계 동료들은 평범한 직장인처럼 연봉과 승진, 이직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잘나가는 복순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복순이 똘똘한 인턴 영지(이연)에게 “요즘 애들”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자 영지가 “이런 일 하시면서 너무 보수적으로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거나, 복순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의 깔끔한 ‘기술’에 엄지를 치켜드는 동료 등 기존의 킬러 영화 관습을 슬쩍슬쩍 비트는 상황들이 영화의 유쾌한 매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전작들의 브로맨스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길복순>은 여성들 간의 유대감을 액션과 감성으로 두루 보여준다. 영지가 함정에 빠진 복순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우는 장면의 액션 연출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여성 간의 연대를 강렬한 한 장면으로 펼친다. 맞으며 컸던 불행한 어린 시절과 자신이 하는 떳떳하지 못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딸만은 귀하고 평범하게 키우려고 몸부림치는 복순의 기대와 달리 마지막에 야무지게 자기 인생의 길을 달려가는 딸 재영(김시아)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캐스팅이 화려하다. 설경구, 이솜, 구교환, 이연 등 관록 있는 배우들과 실력 있는 젊은 배우들이 저마다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조연·단역들까지 빈틈이 없다. 아직 젊은 감독 변성현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출연진 목록일 것이다. 다음달 31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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