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이자 화가 박기웅이 오는 4월11일까지 서울스카이 상설 전시장에서 드라마와 영화 속 인상적인 악인을 그린 <48 빌런스> 전시회를 연다. 그는 2021년 학창 시절 꿈인 ‘화가’에 도전했다. 그는 “갈망하던 것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다”며 <한겨레> 독자들한테도 다시 꿈꾸기를 권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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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빌런’(악인)들이 있다.
조커(<다크나이트>), 안톤 시거(<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애니 윌킨스(<미저리>), 그리고 한국인을 대표하는 최민식과 이병헌까지. 영화(46편)와 드라마(2편)를 주름잡은 빌런 48명이 지난 1월11일 서울스카이 상설 전시장에 모였다. <48 빌런스>. 악인 중에 최고를 뽑는 ‘빌런 영화제’라도 여는 걸까.
서울스카이 상설 전시장 쪽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한 인상적인 빌런들의 얼굴을 그려 전시회를 하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한 달간 총 10만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48 빌런스> 전시장은 해당 영화 혹은 캐릭터를 그리워하는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지난달 10일 찾은 개막 전날에는 연예인들이 그림 속 빌런들을 응시하는 영화 속 장면같은 진풍경도 연출했다. 48명이 출연한 작품 속 명대사와 캐릭터 정보를 볼 수 있는 공간도 한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미술 전시장이지만, 영화제 혹은 영화 정보관의 기능도 하는 ‘빌런 대집합소’다.
그곳에 가면 그림에는 없는 또 한 명의 ‘빌런’도 만날 수 있다.
48명을 초대한 호스트이자 화가 박기웅이다. 2010년 드라마 <추노>의 ‘그분’, 2012년 드라마 <각시탈>의 ‘기무라 슌지’, 2018년 드라마 <리턴>의 ‘강인호’ 등 시청자들이 인상적인 빌런으로 많이 꼽는 캐릭터를 연기한 바로 그 배우다. 특히 <각시탈> 기무라 슌지는 순수한 청년이 ‘흑화’하는 과정에서 소름 끼치는 두 얼굴을 보여주며 관심받았다.
최근 전시장 회의실에서 만난 박기웅은 “과거와 달리 요즘은 악역이 많은 사랑받는다. 작품을 빛내는 악역을 조명하며 그들의 소중함을 보여주고 싶어 이 전시를 기획했다. 제가 악역을 맡는 작품은 승률이 높았다. 이 전시회도 악역이 주인공이라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환한 저 얼굴 어디에 빌런들이 숨어 있는 것인가.
‘배우 박기웅’한테서 ‘화가 박기웅’이 나온 것도 놀랍다. 배우 이시영이 권투 선수로 대회에 출전하고, 가수 솔비가 그림 전시회를 갖는 등 연예인이 재능을 발휘하는 일이 더는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도 박기웅의 행보는 여러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그는 화가로 데뷔한 2021년 이후 9개월 동안 미술 관련 상을 4개나 받으며 업계에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제22회 한국회화의 위상전’에서 ‘이고’로 케이(K) 아트상을 받았고, ‘제25회 관악현대미술대전’에서 ‘불꽃의 얼굴’로 특선 작가 대표로 수상했다. “내가 미술로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데, 그 재주는 이번 <48 빌런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흑백 모노톤으로 작업하고 인물마다 도구·터치 등을 다채롭게 활용해 빌런들의 감정선을 제각각 살리려고 노력한 게 비전문가들한테도 보인다. 그는 “이번 전시에는 두 조커(호아킨 피닉스, 히스 레저)가 등장한다. 히스 레저는 부드러운 둥근모로 마지막에 마른 터치를 해 영화처럼 아픈 내면을 좀 더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빌런들은 1년 반 동안 그렸다. 이번 <48 빌런스>에서는 전시장 콘셉트 등 모든 기획에 직접 참여했다.
그도 안다. 배우가 전시회를 열고 ‘화가’라고 불리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처음에는 순수예술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해 대중들을 대상으로 연기해 온 배우와 화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우려도 컸다”고 한다. “무엇보다 주변에 작가로 자리 잡은 친구도 있고, 자리 잡지 못해 ‘투잡’을 뛰는 친구도 있는데, 나는 어쨌든 ‘배우’라는 베네핏을 얻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요. 그 점이 전공자들한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는 배우 박기웅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리고 “늘 그리자”이다. 전시회를 준비할 때는 짧게는 4~6시간, 길게는 6~12시간 붓을 잡았다. “전시가 있든 없든 매일 그림을 그렸어요. 연기력을 키우는 데도 여러 작품에서 많은 역할을 경험해 보는 게 좋다는 주의예요. 그림도 많이 그리면 실력이 는다고 생각해요.” 촬영 때문에 붓을 한 번 놓으면 손이 금방 굳어 힘든 과정도 겪었다.
“그래도 행복하기만 한” 이유는 못다 이룬 꿈을 20년 만에 꾸고 있어서다. 그는 2003년 원하는 대학 회화과에 떨어진 뒤 좌절했고 여차저차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갔다. 2004년 길거리 캐스팅으로 “생각도 해본 적 없던” 배우가 되면서 ‘본의 아니게’ 화가의 꿈을 접었다. “무명 때는 입시 학원 강사도 하는 등 늘 그림을 갈망해 왔어요. (2006년 휴대폰 광고에서 일명 ‘맷돌 춤’을 추며) 관심받고 배우로 바빠지면서는 시간을 낼 수 없었어요. 요즘은 사전 제작처럼 드라마 촬영 환경이 바뀌었잖아요. 제가 잠만 조금 줄이면 그림과 연기를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도전하게 됐습니다.” 과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최고의 동력이다. 두 번째 개인전 때 작품을 완판했고, 고가에도 팔렸다. 그는 “그림 가격이 높다고 제 가치가 높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을 때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화가 박기웅의 빌런 전시회는 배우 박기웅의 삶과도 연결된다. 그는 자신이 그린 캐릭터들처럼 수많은 악역으로 변신하며 작품을 빛내왔다. <각시탈>에서 연기를 ‘잘한 탓’에 악역 제안이 쏟아진 것이다. 연기 중에 특히 힘들다는 선하고 악한 두 얼굴의 인물을 잘 표현했다. 송아지처럼 크고 선해 보이는 눈이 힘을 한번 주면 매섭게 바뀌며 표정 연기를 특히 잘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등 안면근육을 이용해 캐릭터를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감정의 강약이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설정도 많아 악역이 연기 의욕을 부추긴다”지만, 배우가 특정 역할 전문으로 규정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박기웅도 “30대 초반 때는 악역만 들어왔다. 좀 선한 역할이 하고 싶은데 자꾸 악역만 들어오니까 배우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싶은 아쉬움이 생겼다. 한동안 악역을 멀리하면서 이미지를 희석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후 2019년 <신입사관 구해령> 등 멜로, 코미디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얼굴을 활발하게 보여줬다. 요즘은 작품을 할 때마다 “발견”이라는 소리가 나온다. “2004년 배우 데뷔 이후 입대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년 작품에 출연해 왔는데 말이죠. 하하하.”
<48 빌런스>로 자신이 사랑하는 빌런을 곱씹으면서 애증의 ‘빌런 박기웅’도 깊게 되새겼다. “이 전시에서 시발점이 된 작품은 <타이타닉>에서 혼자 배에 먼저 올라타는 캐릭터(파브리지오)였어요. 얼굴은 알지만 이름을 말하라면 바로 나오지 않는. 최종 48명에는 빠졌는데 그런 분들한테 박수를 치고 싶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촬영 때 연기가 힘들어 사랑한 만큼 미워했다는 기무라 슌지에 마음도 커졌다. 그는 “남들이 볼 땐 나쁜 짓인데 나는 그를 이해해야 했다. 각시탈이 내가 보는 앞에서 형과 아버지를 죽였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도 채갔으니까. 그의 서사에 공감하며 연기하니까 혼란스럽기도 하면서 또 그가 너무 아파 힘들기도 하고. 잠수타고 싶을 정도로 만감이 교차했는데, 그에 빠져서 작품이 끝나고는 엄청 울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8 빌런스>에 전시하고 싶은 자신의 캐릭터를 묻자 “기무라 슌지”를 꼽았다.
못다 이룬 꿈은 미뤄두되, 결코 포기는 하지 말라고 박기웅은 말한다. “이제 와서 무슨” “이걸 다시 어떻게 해” 주저하기 전에 상황에 따라 일단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연기가 마음처럼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 혹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다 괜찮아지더라고요. 내가 오랫동안 바라고 갈망하던 것을 지금 다시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또 지난 인생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앞으로 삶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이전 전시회 때와 달리 직업과 관련있는 <48 빌런스> 속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유독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이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 속 ‘트래비스 비클’이에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케이티엑스(KTX) 표를 끊어놓고 기다리며 작업했어요. 자세히 보면 붓이 미세하게 흔들린 게 보여요. 전시회에서 제외할까 하다가 내가 준비했던 당시 마음들이 담겨있어서 오히려 소중한 작품이 될 것 같았어요….”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후크’를 그리면서는 꿈과 희망을 키웠던 어린 시절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조커를 보면서는 배우로서 내가 이 역할을 하고 싶어 했던 때가 생각 나서….” 과연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