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사 최초로 해금되기 이전의 월북시인 정지용에 관한 연구 논문을 “잡혀갈 각오”로 썼다는 일화로 잘 알려진 국문학자이자 시인인 오탁번 선생이 15일 별세했다. 향년 80.
고인은 1943년 충청북도 제천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석사 논문을 정지용을 주제(‘지용시 연구: 그 환경과 특성을 중심으로’, 1971년 2월)로 삼음으로써 1988년 비로소 해금된 월북시인에 대한 70년대 논쟁의 물꼬를 텄고 향후 활발한 연구를 이끌어냈다. 수도여자사범대 국어과 조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당시 석사 논문을 통해 지용의 시가 중국 한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해 지용 담론의 한 대세를 선도했다.
시인은 연구로 이름을 알리기에 앞서 1966년 동화와 시로 <동아일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엔 소설로 또 신춘문예 당선했다. 1998년 시 전문 계간 <시안>을 창간했고, 2008~10년 한국시인협회장, 2020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이근규 전 제천시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독창적이고 해박한 문학성과 자유로운 시심은 가히 독보적”이었다며 “그 기개와 열정으로 원서문학관을 불세출의 문학살롱으로 지켜내셨다”고 추모했다. 원서문학관은 시인이 고려대를 정년퇴직한 뒤인 2003년 부인 김은자 교수와 함께 자신의 모교였던 백운초등학교의 폐교된 애련분교를 매입해 세운 문학관이다.
시집 <아침의 예언>(1973),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1985), <생각나지 않는 꿈>(1991), <겨울강>(1994), <1미터의 사랑>(1999), <벙어리 장갑>(2002), <손님>(2006), <비백>(2022), 소설집 <처형의 땅>(1974), <새와 십자가>(1978), <저녁연기>(1985), <혼례>(1987),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1988), <순은의 아침>(나남, 1992), 평론집 <현대문학산고>(1976) 등을 남겼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대상 시 부문(2011) 등을 받았다.
빈소는 고려대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 특실. 발인은 17일 오전 10시. 장지는 제천 개나리 추모공원이다.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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