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드러나는 크롭 셔츠에 통바지, 그룹 뉴진스의 ‘디토’ 뮤직비디오에 담긴 비디오테이프 속 오래된 학교 풍경. 패션과 음악 등에서 이미 시작된 1990년대 문화의 귀환이 극장가도 접수했다. 90년대 아이콘 중 빼놓을 수 없는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엔(n)차 관람 바람을 일으키며 개봉 2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설 연휴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을 통해 90년대 감성에 푹 빠질 수 있는 영화 5편을 꼽았다.
환갑의 나이가 무색하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광적 환호를 받은 량차오웨이(양조위)의 대표작 <중경삼림>(1995)은 90년대의 세기말적 분위기에 낡고 낭만적인 홍콩의 도시 풍경, 달콤씁쓸한 연애 감정을 감각적으로 담아낸 영화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흐르면서 량차오웨이가 경찰 모자를 만지며 등장하는 장면은 ‘90년대를 지배한 눈빛’으로 기억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1999년 국내 개봉 전에도 불법 비디오를 통해 수십만명이 봤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왔던 로맨스 영화. 이제는 클래식이라고 불러도 무리 없을 걸작이다. 주연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홋카이도 설원을 배경으로 헤어진 연인을 향해 외치는 “오겐키데스카”(잘 지내시나요)는 수많은 패러디를 탄생시킨 명대사. 아름다운 풍경과 음악, 멜로의 틀 안에서 시간과 기억에 대한 통찰까지 두루 담고 있는 영화다.
헐렁한 티셔츠 위에 민소매 농구티셔츠, 바닥을 청소하고 다니는 길고 헐렁한 청바지 등 90년대 미국 힙합 문화를 다시 느끼고 싶다면 <미드90>(2019)을 추천한다.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듯한 낡고 살짝 빛바랜 화면, 브라운관 티브이(TV) 시절의 1.33:1 화면비율만으로도 추억을 소환하는 이 영화는 1996년의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따라간다. 엄마, 형과 사는 가난한 소년 스티비가 거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휘말리고 겪게 되는 사건과 상처들이 당시를 풍미했던 미국 힙합 음악을 배경으로 지나간다. 90년대를 전후한 명곡들이 이어지는 ‘플레이리스트’ 영화다.
<미드90>이 90년대의 소년 이야기라면 <벌새>(2019)는 같은 시기의 지구 반대편 소녀의 성장담이다. 8학군이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순박함이 남아 있던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각자의 불행을 조금씩 안고 사는 다섯 식구의 막내딸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이야기다. 90년대를 보여주는 티브이 광고와 옷 브랜드, 카세트테이프와 유행가들이 영화적 정서 안에 녹아 있으며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라는 대형 참사가 평범한 10대의 마음에 던진 파고 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20세기 소녀>는 1999년을 배경으로 예기치 않은 첫사랑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진 여고생 보라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10대 시절의 마지막을 그린 작품이다. 90년대 학생들의 가장 설레는 이벤트였던 수학여행이 주요 모티브로 등장한다.
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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