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해 큰 울림을 준 배우 나문희.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사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엄마에게 자식이라는 건 열살이든 서른살이든 내 자식이 우선인데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끝까지 일본군과 싸워라, 목숨을 바쳐라 했잖아요. 나라를 위해 자식을 바친다는 게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일 아닌가요?”
지난달 21일 개봉한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한 배우 나문희(81)는 연기자 입장에서 아들에게 항소 대신 용기 있는 죽음을 맞으라고 말하는 심정이 어땠을지 묻는 질문에 “말이 잘 생각 안 난다”고 했다. 자식 셋을 배 속에 품고 길러낸 엄마로서 그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대신 그는 “내가 가진 능력으로 끝까지 연기해보자 마음먹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4일 오후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데뷔 반세기를 훌쩍 넘긴 노장 배우를 만났다.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해 큰 울림을 준 배우 나문희.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해 큰 울림을 준 배우 나문희.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윤제균 감독이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웅>은 안중근에 관한 영화이면서 “어머니에 관한 영화”다. 나문희가 연기하는 조마리아는 길지 않게 등장하지만 관객 마음을 흔드는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펼쳐놓는다. 아들이 입고 형장으로 갈 수의를 지으며 부르는 ‘내 아들 도마’를 들으면 오열이 터지는 걸 막기 힘들다. 하지만 나문희의 연기가 더 빛을 발하는 순간은 노래가 나오기 전 온갖 감정을 마음에만 담은 채 홀로 해가 질 때까지 아들 사진을 우두커니 보고 있을 때다. 관객 가슴속에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감정이 큰 파고가 되어 일렁이게 만드는 건 오롯이 배우 나문희의 몫이다.
<거침 없이 하이킥> 중 한 장면. 화면 갈무리
“윤제균 감독과는 그가 제작한 <하모니> 출연 때 인연을 맺었어요. 그때 잘 대접해주셨어요. 아, 날 믿는 게 있구나 싶었죠. 그런 믿음으로 이번 역할도 맡게 됐습니다. 아들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고, 그 아들이 떠난 다음에 엄마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내내 하며 준비했던 거 같아요.” 연기하면서 라이브로 불러야 했던 노래 연습은 피아노를 전공한 큰딸의 도움을 받았다. “가족이라 냉정하게 평가받으면서(웃음) 연습했는데, 딸이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나문희는 1961년 성우로 데뷔한 뒤 수많은 티브이(TV)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 이력은 환갑 넘은 뒤에 비로소 활짝 피어 <아이 캔 스피크>(2017)로 국내 주요 영화상 최우수 연기상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 전만 해도 열등감이 많아서 자꾸 누군가와 경쟁하려고 했는데 (수상을 계기로) 마음이 자유로워졌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배우로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일상의 감각이다. 그는 “배우로서 중요한 건 평소 삶이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연기에 묻어나오기 때문”이라며 “된장찌개를 끓이는 평범한 장면이라도 직접 끓일 줄 아는 것과 흉내를 내는 건 다르다”고 말했다. “공중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 담그고 불경을 외고, 남들 눈이 의식되기도 하지만 기운 남아 있을 때 버스도 타고 시장에도 가는” 것들이 그가 배우로서 지키고자 하는 생의 감각이다. 그 때문인지 그는 지금껏 가장 아끼는 캐릭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모든 역할이 소중하다’는 식의 뻔한 답변 대신 “호박고구마”(<거침없이 하이킥>의 문희 역)라고 단박에 답했다. “사는 게 힘들잖아요. 나이 들수록 웃음이 있는 역할이 좋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중 한 장면. 드라마 화면 갈무리
팔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를 찾는 사람이 많고, 그 역시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 최근에는 <진격의 할매> <뜨거운 씽어즈> 같은 예능프로그램뿐 아니라 쇼트폼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 틱토커로도 데뷔해 100만 조회수를 찍었다. 그는 “나도 새로운 일을 할 때는 항상 두려움이 있지만, 겁 없이 달려드는 면도 있다. 틱톡은 매일 움직일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의 감각도 익히게 되어 좋다”며 “나이 들수록 유연성이 중요한 것 같다. 나를 포함해 모든 할머니들이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해 큰 울림을 준 배우 나문희.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그는 팔순 넘어서도 쉬지 않고 연기하게 하는 원동력을 “철없음”이라고 표현했다. “연기 자체가 즐겁지는 않아요. 아직도 다음날 촬영 있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힘들어요. 그런데 현장 가면 철없이 신이 나요. 이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 초짜 신인이라도 연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 기분 좋고 함께 일하고 싶죠.”
이렇게 힘들어도 좋아하는 연기라면 다음 생에도? “아우, 싫어요. 사는 거 자체가 힘든데 왜 또 태어나요.” 명랑한 할머니 배우에게서 듣는 이 말보다 더 큰 공감과 위로가 또 있을까.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