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수.’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기묘한 수단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본 만화 <히카루의 바둑>에서 유래한 것으로, 작중 후지와라노 사이가 추구하는 바둑의 극의를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다. 2022년 방송 콘텐츠 시장도 수많은 ‘한수’들이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비엘(BL·보이스 러브)드라마 인기에 ‘설마’ 하던 퀴어 예능이 등장했고, 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의미 있는’ 일도 일어났다. 넷플릭스에 종속되어가는 케이(K)콘텐츠 시장의 탈출구도 누군가의 ‘한수’로 찾아냈다. 이 ‘한수’들을 모아 보면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공통점도 읽힌다.
어떤 변화든 실패를 깔아놓은 누군가의 과감한 ‘한수’로 시작된다. <한겨레> 엔터팀이 뽑은 2022년 방송계를 성장케 한 ‘신의 한수’들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제작사 에이스토리 이상백 대표. BCWW 제공
K콘텐츠 지켜낸 <우영우> 에이스토리 이상백 대표의 ‘한수’
올해 방송 콘텐츠 핵심 키워드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다. 이 작품의 여러 화제성에는 제작사인 에이스토리 이상백 대표의 ‘한수’가 있었다. 넷플릭스가 아닌 <이엔에이>(ENA) 채널을 택했다는 것. 이상백 대표는 추정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는 대신 지식재산권(IP·아이피)을 요구한 넷플릭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아이피를 갖고 인지도 없는 신생 채널인 <이엔에이>에서 방영하는 것을 택했다. 그는 지난 3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아이피를 갖는 것은 제작사가 생존하는 길”이라며 “우리 콘텐츠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선택으로 에이스토리는 <우영우> 웹툰에 이어 2023년 연말께 <우영우> 뮤지컬 버전도 선보인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오티티)에 종속되어온 국내 콘텐츠 시장을 들썩이게도 했다. <우영우>가 성공하면서 넷플릭스가 아니어도 작품만 좋으면 시청자들이 찾아서 본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동안 넷플릭스가 모든 권리를 가져가는 것에 부당함을 느껴도 또 넷플릭스가 아니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상백 대표는 “해외 리메이크 버전도 방영 예정인데 지금까지 하지 않은 또 다른 ‘한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일 봬요 누나” <환승연애2> 이진주 피디 후발 주자 투입의 ‘한수’
2022년을 빛낸 인물이라면 이들을 빼놓을 수 없다. 정현규, 남희두, 성해은, 김태이, 박나언 등등. 오티티 티빙에서 지난 7월 선보인 <환승연애2> 출연진이다. 연애프로그램의 인기는 어제오늘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후반 투입자의 출연 시점이 여느 프로그램보다 뛰어났다. 이진주 피디의 ‘한수’는 정현규의 투입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사람의 투입으로 한 남자만 바라보던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놓으며 프로그램에 다시 긴장감을 가져왔다. 이진주 피디는 3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어떤 분을 후반에 투입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한다. 후반 투입자들은 혼자서 주목을 받기 때문에 매력도 있어야 하고, 이미 관계가 견고해진 기존 출연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 만큼 자신감, 자존감도 있어야 한다. 현규-나언 커플은 서로 미련도 없어 보였고, 후발 주자로 적당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런
정현규가 성해은한테 한 “내일 봬요 누나”는 올해 최고의 유행어. 이진주 피디도 생각하지 못한 ‘신의 한수’, 아니 ‘신의 한마디’였다.
‘우리들의 블루스’ 정은혜 작가와 노희경 작가. 정은혜 작가 쪽 제공
장애인 배우 길 열어준 <우리들의 블루스> 노희경 작가의 ‘한수’
“우리 모두가 각자 삶의 주인공 아닌가요?” 노희경 작가는 지난 10월 <방송작가> 웹진에서 우리나라 <우리들의 블루스>(tvN·티브이엔) 집필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이 시작은 올해 우리나라 드라마 사에서 의미 있는 획을 그었다. 다운증후군 역할(영희)을 실제 다운증후군 배우(정은혜)가 연기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미니시리즈에 주조연급으로 등장하는 장애인 역할을 장애인이 직접 연기한 것은 처음이다. 노희경 작가의 ‘한수’는 시청자들한테 장애인이 연기를 한다는 것에 선입견을 깨줬다. 정은혜 배우는 장애인 언니를 둔 동생의 마음, 그리고 동생을 생각하는 언니의 마음을 진정성 있게 담아냈다. 시청자들은 오히려 그런 정은혜의 연기에 깊게 빠져들었다. 정은혜는 캐리커처 작가다. 노희경 작가의 ‘한수’ 이후 다음 수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듯하지만, 정은혜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은 활짝 열렸다.
‘남의 연애’ ‘메리퀴어’ 임창혁 시피.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퀴어 예능’으로 편견을 깬 임창혁 시피의 ‘한수’
이 ‘한수’는 정말 모 아니면 도나 마찬가지였다. 비엘드라마 <시맨틱 에러>(왓챠)가 인기를 끌었지만, ‘퀴어 예능’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다. 지난 7월께 <메리 퀴어>와 <남의 연애>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오티티 웨이브에서다. <메리 퀴어>는 퀴어 커플 세쌍이 연애와 결혼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이고, <남의 연애>는 연애리얼리티프로그램이다. 한집에 살면서 마음에 드는 이들을 선택한다. 이 ‘한수’는 방영 전에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특히 남자들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커플을 맺는 <남의 연애>에 대한 선입견은 엄청났다. 방영을 시작하자 편견부터 갖고 있던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프로그램은 진심이다. 임창혁 책임피디(CP·시피)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찬성 반대를 떠나 우리가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며 “본인 의사를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참고서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연애’에만 귀 기울이지 말자. 이들이 다 같이 모여 한잔하며 나누는 대화에서 진솔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전국노래자랑’ 김신영, 김상미 시피. 한국방송 제공
세대 화합 대표 프로로 <전국노래자랑> 김상미 시피의 ‘한수’
“김신영씨 어때요?” 김상미 시피가 회의 시간에 내놓은 한마디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김상미 시피의 ‘한수’였다. <전국노래자랑>은 송해 선생님이 떠난 뒤 후임 진행자 자리가 숙제였다. 이상벽, 이상용 등 늘 거론되는 인물들이 있었다. 김신영이라는 의외의 카드로 <전국노래자랑>은 <한국방송>(KBS)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우뚝 섰다. 무대 위아래에 젊은 세대가 많아졌다. 신구 화합이 이뤄진다. “저 사람이 누구냐”는 어르신의 물음에 20대 학생들이 답해주는 모습도 보인다. 국외에서 온 가수가 사투리로 노래하며 객석의 어르신들이 웃는다. 2022년 방송계에서 가장 놀라운 ‘한수’이자, 화합의 장을 이룬 ‘한수’다. 김상미 시피는 3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정말 오래된 프로그램이라 구태의연해지기 쉬운데 젊은층의 관심도 생기면서 활력도 돌고 있다”며 김신영의 한수에 “200%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에는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 깜짝 놀랄 ‘한수’를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