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시리즈 <사막의 왕> 연출과 극본을 맡은 김보통 작가. 그는 언론에 얼굴을 공개하기를 꺼려 탈을 쓴다. 왓챠 제공
바늘구멍보다 더 좁은 취업 경쟁을 뚫고 들어간 대기업 문팰리스. ‘메타버스유비쿼터스엔에프티디지털컨버전스딥러닝빅데이터티에프팀’이라는, 폼나는 단어는 다 들어가 있는 팀에 들어갔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동그라미나 세모 따위를 반복해 그리는 것뿐이다. 일의 이유나 의미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월급 통장이 채워진다는 것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왓챠에서 지난 16일 공개한 6부작 시리즈 <사막의 왕>은 2021년 넷플릭스 화제작 <디피>(D.P.)의 각본을 쓴 김보통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직접 연출까지 맡은 1화 ‘모래 위의 춤’은 돈이 권력이자 의미이고 목표인 현대사회에 대한 우화처럼 보인다. 지난 26일 서울 동교동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김 작가는 “우화 같지만 다큐라고 생각한다”며 “처음에는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게 말이 돼?’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드라마를 보다가 어느 순간 ‘나의 일, 나의 삶은 이것과 얼마나 다를까?’ 질문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랑스러워하던 대기업 직장인의 삶을 접고 ‘반백수’ 만화가로 살기까지를 쓴 에세이집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2017)에서 먼저 보여준 작가의 고민이 드라마로 이어진다.
왓챠 시리즈 <사막의 왕> 한 장면. 왓챠 제공
<사막의 왕> 모든 에피소드에는 돈에 휘둘리거나 쫓기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빚더미에 앉은 다단계회사 직원(이홍내), 회사 일과 전처의 양육비 독촉에 허둥대다 뒤늦게 아이와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아빠(양동근), 후원금 부족으로 망한 유튜버(김재화), 취업을 독촉하는 아빠에게 “죽어서 보험금이라도 내놓으라”며 악담을 퍼붓는 게임 중독자(장동윤) 등 벼랑 끝에 몰려서, 또는 벼랑 끝으로 몰리면서도 그릇된 판단을 하는 인물들이다. 우연히 편의점 강도를 잡아 ‘용감한 시민상’을 탄 뒤 경찰 시험을 준비하지만 끝내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천웅처럼 말이다.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다고 사람이 바뀌는 일은 드라마에나 있다. 우연은 그저 우연으로 끝나는 게 현실에 더 가깝지 않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불쾌하거나 한심한 인물들일 수 있지만 이게 진짜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왜 이들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왓챠 시리즈 <사막의 왕> 한 장면. 왓챠 제공
우화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사막의 왕>이 도착하는 곳은 알전구가 반짝거리는 세트장 같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사막처럼 냉정한 현실이다. 이는 김 작가가 가장 좋아한다는 소설가인 위화의 작품 세계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위화는 모든 작품에서 인생은 냄새나고 끔찍하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순간 간단히 무너질 수 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군대에서 위화 책을 탐독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이럴 수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사막의 왕>은 매 에피소드가 완결되는 이야기를 가진 옴니버스식 구성을 이루면서도 1화 주인공이 3화에 뜬금없이 등장하고, 5화 이야기에 6화 주인공이 뛰어드는 등 서로 유기적으로 얽힌 세계관을 보여준다. “병풍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고민과 드라마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또 “유일하게 돈이나 사회적 통념에 휘둘리지 않는 아이부터 정의 구현이라는 나름의 명분을 손쉽게 돈의 힘과 맞바꾸는 유튜버까지, 각 인물이 서로의 과거이면서 미래라는 걸 돌아볼 수 있도록 하려고” 흥미로운 구조를 짰다. 김 작가가 직접 추천한 웹드라마 <좋좋소>의 이태동 감독, 영화 <불모지>의 이탁 감독과 셋이서 에피소드를 나눠 연출했는데도, 6부작 전체가 균질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는 이런 구성의 묘가 한몫했다.
왓챠 시리즈 <사막의 왕> 한 장면. 왓챠 제공
작품 설계자가 김 작가라면, 스토리 안에서 이 모든 벼랑 끝 시나리오를 설계한 자는 문팰리스 사장(진구)이다. 결국 모든 인물은 그가 돈으로 즐기는 놀이판의 말들인 셈이다. 말하자면 사장은 “의인화된 돈 그 자체”다. “노예제, 신분제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점점 더 강하게 지배받으면서도 세련되고 정교한 방식 때문에,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게 아닐까.” 김 작가는 이런 질문을 머릿속 어딘가에 메모지로 붙여놓고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김 작가가 왓챠에서 스핀오프 형식으로 연재 중인 동명 웹툰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어둡고 쓸쓸하며 속 타다가 웃음 터지고 잠깐씩 따뜻해지는 ‘김보통 유니버스’의 다음 단계를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