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덴버 죽이기> 스틸컷. 트리플픽쳐스 제공
23일 개봉하는 <존 덴버 죽이기>는 국내에선 처음으로 정식 개봉하는 필리핀 영화다. 필리핀 영화는 우리 영화와 얼마나 다를까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낯설지 않다. 도리어 소름 끼칠 만큼 가깝게 느껴진다. 주인공 존 덴버가 처하는 상황이 한국의 10대, 그리고 전세계의 모든 소셜미디어 사용자가 겪을 수 있는 악몽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가난한 중학생 존 덴버는 아이패드를 잃어버린 동급생으로부터 의심을 받는다. 평소에도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혀온 친구가 다짜고짜 가방을 열라고 하자 그는 거부한다. 가방을 뺏기자 화가 난 존 덴버는 동급생을 때리고 이 모습이 다른 반 친구들에게 영상으로 찍혀 소셜미디어에 올라가면서 존 덴버는 한순간에 아이패드 도둑에 학교폭력 가해자로 둔갑한다.
영화 <존 덴버 죽이기> 스틸컷. 트리플픽쳐스 제공
존 덴버의 동영상은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낙인은 다른 낙인을 불러오고 누군가의 악의 또는 장난으로 미세한 조작이 이뤄지면서 스스로 중립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마저 존 덴버가 도둑이라고 믿게 된다. 홀로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는 존 덴버의 엄마만이 아들의 결백을 믿고 싸운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과 왜곡의 덩어리는 두 모자가 질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소셜미디어의 폭력성과 순식간에 벌어지는 여론 왜곡 현상은 이제 전지구적인 문제다. 사소한 오해나 잘못된 믿음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증편향으로 단단해지고 죽음을 부르는 일조차 드물지 않다. 특히 존 덴버처럼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이들이 최후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방송작가로 15년간 활동하고 첫 장편을 연출한 아르덴 로드 콘데스 감독은 평범한 소년 존 덴버가 악마화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차분하게 따라간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전세계 15개 영화제에서 수상한 문제작이다.
영화 <존 덴버 죽이기> 스틸컷. 트리플픽쳐스 제공
‘이 영화 벌써 개봉한 거 아니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존 덴버 죽이기>는 이달 초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일주일 동안 ‘프리미어 시사’라는 형태로 무료 상영을 했다. 네이버 시리즈온을 통한 무료 시사는 처음 시도된 홍보 방식이다. 코로나 이후 씨가 마르다시피 한 독립·예술영화 시장에서 작은 영화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배급사 트리플픽쳐스가 네이버와 손을 잡았다. 강기명 트리플픽쳐스 대표는 “영화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 학생들이나 학부모, 교사들이 봤으면 하는 영화인데 최근 중소규모 영화들의 개봉 여건이 더 어려워지면서 입소문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아 궁리 끝에 온라인 무료 시사를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코로나 이후 극장 수익이 줄고 이에 따라 극장들이 독립·예술영화 상영을 더 기피하면서 힘들어진 상황에서 트리플픽쳐스가 네이버 쪽에 제안했고 4개월간의 의견 조율 끝에 온라인 시사를 진행했다. 강 대표는 “이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마케팅 방식이지만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알리기 위해 전보다 치열하게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시도한 모험”이라고 말했다.
영화 <존 덴버 죽이기> 스틸컷. 트리플픽쳐스 제공
트리플픽쳐스는 차기 배급작으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한국 영화 <혜옥이>(12월8일 개봉)도 네이버 시리즈온을 통해 온라인 시사를 연다. 오는 25~27일, 네이버 아이디를 가진 이용자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