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현실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형제복지원이 떠오르는 <블라인드>와 쇼트트랙 담합·폭행 등 스포츠 전반의 적폐를 다룬 <멘탈코치 제갈길>이다. <블라인드>는 1회부터 도입부에 매회 희망복지원이란 곳에서 아이들이 지내는 모습을 내보내고, <멘탈코치 제갈길>은 체육회의 파벌 다툼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촘촘함 등에서 아쉬움은 있지만, 의미 있다.
<블라인드> “형제복지원 떠오르는 아이들…윤재야 힘내 난 네편이야
“‘그곳’에선 아이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때리고 죽여요.”
‘그곳’에서 목숨 걸고 탈출한 소년이 말했다. 경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에 아는 대로 다 적어 봐. 그곳 위치도.” 소년은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한참 뒤, 경찰차 뒷좌석에서 잠이 든 소년이 눈을 뜬 곳은 희망복지원. 차창 밖에서 아까 그 경찰이 90도로 고개 숙인 원장한테 호통치고 있었다. “애들 간수를 어떻게 하는 거야! 이놈이 경찰서까지 도망쳐왔다고!”
지난 9월16일 시작한 <티브이엔>(tvN)의 금토드라마 <블라인드>는 복지원을 탈출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공무원이 복지원을 점검하기 전날 밤. 아이들은 함께 탈출하던 친구가 잡혀서 죽고, 죽을 위기에 처하고, 탈출했다가도 “다 한패”인 경찰에 다시 붙잡혀 오는 상황에 무너진다. 아이들이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도망가고 싶어하는 드라마 속 희망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존재한 부산 형제복지원과 닮았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아 관리’라는 명목으로 어른, 어린이 할 것 없이 강제로 끌고 가 가혹 행위를 일삼은 곳이다.
희망복지원에서 11번으로 불렸던 ‘등장인물’(*스포일러 방지 차원)은 성인이 된 이후인 12회에서 희망복지원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곳은 거대한 감옥이었어! 병들어 죽거나 맞아 죽은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어. 운이 좋으면 뒷산에 묻히거나 나쁘면 해부학 실습실에 기증된다는 소문이 돌았어. … 우리가 견딜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었어. 처음엔 그저 몇몇 나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 시선도 마찬가지였어 … 그렇게 세상과 철저히 소외당했다는 그 절망감이 그 모든 부당한 대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했어. ”
복지원 자체가 소재가 되고, 관련된 인물들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 작품은 이례적이다. 이 드라마를 집필한 권기경 작가는 <티브이엔>을 통해 “(복지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호가 필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고 소재로 삼은 이유를 말했다. 그래서 <블라인드>는 복지원의 참상을 드러내기보다는, 어린 시절을 빼앗긴 아이들과 그들을 보호하지 않은 어른들의 현재 모습에 주목한다. 어떤 사건에 배심원으로 참가한 이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니 희망복지원이다. 사건을 풀어가는 형사 류성준(옥택연)과 판사 류성훈(하석진), 복지사 조은기(정은지)는 희망복지원 피해자 중 누군가가 당시 관계자들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인이란 방식으로 가해자를 응징하는 설정에는 반응이 갈린다. 피해자였던 그들을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 잔인하다는 것과 드라마에서라도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현실의 형제복지원은 원장을 포함해 당시 근무자들이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블라인드> 속 복지원 관계자들도 과거를 숨기기 바쁘고, 파출소 소장은 경찰 서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단, 이 드라마가 형제복지원을 시청자들에게 환기해주는 역할은 확실하게 하고 있다. <블라인드> 드라마 톡방을 보면, 형제복지원 참상을 찾아봤다는 글이 종종 보인다. “현실은 더 끔찍하다 진짜. 복지원에 사람 한 명 넣을 때마다 경찰들 성과 반영이라 멀쩡한 남의 아들 길에서 돌아다니는 거 데려다가 가두고, 때려서 일 시키고… 윤재(드라마에서 많은 이들이 범인이라고 추측하는 이름)야 힘내라. 난 네 편이야.”
권 작가는 “어느 곳에서든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존재하고 이를 잘못 쓸 때 피해자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가해자는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목의 ‘블라인드’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진실을 알고 있지만 다양한 이유로 외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담았다”고 밝혔다.
스포츠계 비리 다룬 <멘털코치 제갈길>과 형제복지원 연상시키는 <블라인드>. 티브이엔 제공
<멘탈코치 제갈길>에서 폭력 코치에 맞서는 쇼트트랙 선수 차가을을 연기한 이유미. 티브이엔 제공
<멘탈코치 제갈길> “선수들만 멘털 잡으면 뭐하나, 웃대가리들이 파괴 주범인데”
4년 전 어렵게 드러난 빙상계의 비리도 드라마는 다시 한번 상기한다.
올림픽 쇼트트랙 국가대표 오달성(허정도) 코치가 조지영(김시은) 선수를 방으로 불러 말한다.
“너 이번에 차가을(이유미) 페이스메이커 해. 다음에 너 1등 시켜줄게.” 스포츠 뉴스가 아니다. 방영 중인 <티브이엔>(tvN) 월화드라마 <멘탈코치 제갈길>(티브이엔)의 한 장면이다. <멘탈코치 제갈길>은 국가대표 선수의 멘털을 관리하는 태권도 선수 출신 제갈길(정우)의 이야기. 요즘 이 드라마가 뉴스보다 더 맵게 체육계 내부를 꼬집고 있다.
4년 전 빙상계의 큰 문제였던 짬짜미(담합) 파문과 폭력사태, 파벌 다툼은 이 드라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선수촌을 배경으로 여러 종목을 담당하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쇼트트랙 선수 차가을이다. 차가을을 포함해 선수들은 코치한테 맞고, 언어폭력을 당한다. 오 코치는 차가을이 자신의 대학팀이 아닌 실업팀으로 가자 그때부터 대놓고 괴롭힌다. “내가 코치로 있는 이상, 너는 끝났다”며 선수가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 막기도 한다. 이런 장면들은 체육계에서 지도자의 막강한 힘을 보여준다.
담합은 무려 17년 전인 2005년에도 관련 보도가 나왔다. 최근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특히 폭력을 당연한 것처럼 여겨온 선수들의 모습에서 마음이 아프다는 반응이 많다. 극 중에서 “더는 맞으며 운동하기 싫다”는 오선아(박한솔)한테 엄마는 말한다. “안 맞고 운동하는 선수가 어딨어. 니 오빠 봐. 야구 빠따로 맞아도 금메달 따. 코치가 미우면 그렇게 갚아줘야지.” 연습장에 왔다가 가을이 코치하게 맞고 있는 걸 본 엄마는 그대로 돌아서 집으로 가버린다. 그런 코치를 선수들이 용기 내어 고발했더니 그는 다시 돌아왔다. 메달을 잘 따온다는 이유로.
2018년 드라마 <쇼트>처럼 페이스메이커를 등장시킨 작품은 있었다. <멘탈코치 제갈길>은 체육회 비리도 함께 담아낸 점이 눈길을 끈다. 인권센터에 제보가 들어와도 묵인하고, 그게 밝혀질까 봐 쉬쉬하는 모습이 드라마 속 얘기만은 아니다. 드라마 속 수많은 ‘장’들에게 올림픽은 ‘내 자리 지키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오 코치는 팀 에이스 선수가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도 “이번 올림픽은 나가고 하라”고 말한다.
제갈길을 통해서는 심판 매수, 승부 조작 문제도 꼬집는다. “…심판도 체대 라인. 어차피 올림픽은 구태만(권율)이 나가게 돼 있어. 판정 가서 쟤네 라인 이긴 역사가 없어”라는 식의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제갈길도 구태만의 승부 조작 피해자였다. 이 드라마를 연출하는 손정현 감독은 <티브이엔>을 통해 “제갈길은 멘털 코치를 이어가는 동시에 선수촌을 둘러싼 비리와 적폐를 뿌리 뽑는 활약을 펼칠 예정이다. 충분히 기대하셔도 좋다”고 밝혔다.
극중 모아름으로 나오는 배우 노아름은 쇼트트랙 국가대표 출신이다. 그는 <티브이엔>을 통해 “대본을 받아보고 너무 공감돼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제갈길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선수들만 백날 멘털 부여잡고 정신승리하면 뭐하냐. 웃대가리들이 멘털이 썩었는데. 멘털파괴 주범의 세상인데.”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