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의 노덕 감독(맨 왼쪽)과 진한새 작가(맨 오른쪽). 가운데는 <글리치> 두 주인공 지효(전여빈·왼쪽)와 보라(나나). 넷플릭스 제공
지난 7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는 폭발적 흥행까진 아니어도 독특한 색깔과 비범한 성취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어딘지 불완전해 보이는 지효(전여빈)와 보라(나나)가 외계인을 추적하고 사이비 종교 단체에 잠입하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는 한층 더 진일보한 여성 서사를 내보였다는 평을 듣는다. 최근 제작진을 잇따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이는 누구 하나가 주도적으로 이끈 게 아니라 여럿이 힘을 더한 결과였다. 각기 헤매던 지효와 보라가 만나 서로 의지하며 끝내 사건을 해결한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출발은 사소한 대화에서 비롯했다. 진한새 작가의 아내가 “어릴 적 유에프오(UFO)를 봤다”고 한 것이다. “저는 ‘못 믿겠다’, 와이프는 ‘사실이다’ 옥신각신했는데, 이 상황 자체가 재밌더라고요. 이걸 늘리면 드라마가 되겠다 싶었죠.” 진 작가 머리에 문득 예전에 본 일본 만화 속 여고생 둘이 학교 옥상에서 만나는 장면이 스쳤다. “‘날라리형’ 아웃사이더와 ‘모범생형’ 아웃사이더가 만나는 장면의 그 느낌이 좋았어요. 남자 둘이나 남녀로 바꿔보니 그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 그래서 여자 둘을 주인공으로 하자 했죠.”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 대본을 쓴 진한새 작가. 넷플릭스 제공
아이디어를 들은 윤신애 스튜디오329 대표는 고민했다. 1990년대부터 드라마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송지나 작가의 아들이라고는 해도 2020년 당시 무명이던 진 작가와 10대 범죄물을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 <인간수업>을 함께 만들어 호평받았다. “팬덤이 탄탄한 남자 주인공 없이 여자 주인공으로만 하는 건 모험이거든요. 한편으론 지금 안 하면 언제 또 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그래, 지금 한번 해보자 했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너지의 진 작가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요.” 제작을 결심한 윤 대표는 연출자로 노덕 감독을 떠올렸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연인의 심리를 섬세하게 담아낸 영화 <연애의 온도>(2013)를 인상 깊게 본데다, 같은 여자로서 주인공들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제안을 받은 노 감독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과거 외계인 소재 작품을 구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땐 오티티(OTT)도 없던 때라 두시간짜리 영화로 풀긴 어렵겠다는 판단에서 보류했거든요. 비슷한 작품을 제안받아서 놀랐어요. 내가 안 해도 작품은 만들어질 거고, 그러면 내가 구상했던 작품은 아류작이 될 테니, 그냥 해버리자 했죠.” 이런 노 감독의 얘기를 듣고는 진 작가는 든든해졌다. “사실 외계인 얘기가 제겐 벽처럼 느껴졌는데, 이미 비슷한 얘기를 하려 했던 감독님에겐 벽 같은 게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를 연출한 노덕 감독. 넷플릭스 제공
진 작가와 노 감독이 본격적으로 결합한 건 대본이 2~3화 정도까지 나왔을 때였다. 진 작가는 대본 쓸 때부터 염두에 둔 전여빈을 지효 역에 추천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JTBC)에서 전여빈이 상사에게 야단맞는 장면에 꽂혔거든요.” 노 감독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보라 역에 나나를 추천했다. “지효와 정반대였으면 해서 나나를 떠올렸어요. 드라마 <굿와이프>(tvN)의 똑 부러진 모습에 반했거든요.” 진 작가도 무릎을 쳤다. “감독님 추천으로 나나를 만나보니 말투가 나른하면서도 개성 있었어요. 대본 쓰면서 보라의 대사 톤을 못 잡고 있었는데, 나나의 말투를 곧바로 반영했죠.”
남자인 진 작가가 여성들 심리를 깊게 묘사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진 작가는 “어릴 때 순정만화를 좋아했다”며 “아내와 감독님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진 작가와 노 감독은 수시로 회의하고 막판엔 거의 합숙하다시피 하며 대본 작업을 했다고 한다. 진 작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저는 공동작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 감독은 “영화 작업 땐 직접 각본을 썼기에 작가와 일한 게 이번이 처음인데, 2인3각의 의미를 알겠더라”며 “한명이 다리를 절면 다른 한명이 끌고 가는 순간이 여러번 있었다”고 털어놨다. 극 중 지효와 보라가 2인3각으로 앞으로 나아간 과정이 두 사람의 작업 과정과 겹쳐 보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외계인 소재 에스에프(SF)물의 외피를 두르곤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지효와 보라의 관계에 집중하는 ‘버디물’이라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 진 작가는 “어렸을 때 재밌는 놀이를 하다 찢어진 두 사람이 훗날 만나 관계를 풀어나가는 게 핵심이라고 봤다”고 했다. 노 감독도 “관습화된 미스터리, 스릴러보다는 두 사람의 감정과 우정에 초점을 맞춘 버디물로 보여주는 데 연출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여성 서사라는 관점에 힘을 줬냐는 질문에 노 감독은 “진 작가와 여성 서사, 여성들의 연대 이런 얘기는 한번도 안 했다. 여성성, 남성성을 떠나 다들 동등한 각각의 캐릭터로만 봤다”며 “작품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인 믿음, 확신, 자기 의심 등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겪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더욱 진일보한 작품이 된 건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