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일본에서 나고 자라 북한으로 떠난 오빠들과 남은 가족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든 <디어 평양>(2006), <굿바이, 평양>(2011)의 양영희 감독이 10년 만에 새 작품 <수프와 이데올로기>(20일 개봉)로 돌아왔다. 수프는 양 감독이 데려온 ‘새신랑’에게 어머니가 끓여주는 닭백숙을 가리키고, 이데올로기는 어머니가 가슴속에 묻어뒀던 제주 4·3 사건에 닿아 있다. 떠난 식구(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 새로운 식구와 지워졌던 어머니의 시간을 가족 3부작의 완결편에 담았다. 지난 12일 서울 동작구 영화관 아트나인에서 양 감독과 만났다.
“어머니는 ‘한국(남한)은 잔인해’라는 말을 젊은 시절부터 자주 하셨어요. 그때는 엄마가 편협하다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의 이야기가 조금씩 길어지고 연결되면서 왜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왜 북한을 희망으로 생각하게 됐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다큐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연출한 양영희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양 감독은 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면서 입·퇴원을 거듭하는 어머니를 돌봤다. 본래 작정하고 어머니의 증언을 카메라에 담은 건 아니다. “툭툭 꺼내는 이야기가 처음엔 너무 적어서 장편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가족 기록용이나 단편 작업 정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당신 병원비까지 아껴가며 (아들들이 있는) 북한에 계속 송금하는 어머니와 돈 문제로 싸운 시간이 더 많았어요.”
지지부진하던 촬영이 전환점을 맞은 건 ‘일본인 사위’(생전 아버지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던!)가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어머니에게 인사를 오면서다. 어머니는 긴 시간 뭉근하게 끓인 닭백숙을 사위에게 먹인다. 이후 집에 드나들며 4·3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묻기 시작한 사위에게 15살 나이에 어린 두 동생 손을 잡고 밀항선을 타게 만든 고향 제주에 대해 길고 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제주도에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 그를 위해 목숨 걸고 휘발유까지 운반했던 기억, 잔인하게 목숨을 잃은 약혼자와 가족과 이웃들 이야기, 모두 처음 알게 됐어요.” 사실 그는 1990년대 후반 미국 유학 시절 역사학자였던 은사의 남편에게서 해방 이후 제주에서 벌어졌던 학살 사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잘못 아시는 거라고, 아마 1980년 광주랑 헷갈리신 것 같다고 답을 했는데,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실제 그런 사건이 있었고 엄마가 생존자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다큐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는 2018년 어머니를 모시고 4·3 사건 70주년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를 찾았던 일도 담았다. 어머니의 첫 귀향이었다. “어머니는 한국에 오는 걸 무서워했어요. 이제 민주화됐고 4·3도 정부가 인정하고 평화공원도 생겼다고 말해도 믿지 않으셨어요.” 젊은 시절에는 북한을 굳건하게 믿는 어머니가 무지해 보였지만, 남한에선 총칼로 위협받으며 쫓겨나다시피 하고 일본에선 수십년간 차별받아오면서 ‘마음의 고향, 조국을 정말 갖고 싶었던 사람이구나. 힘든 일이 있었던 사람일수록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어머니에게는 북한이 믿음이었구나’라는 걸 깨달았단다.
어렵게 돌아온 제주에서 어머니는 말을 잃었다. 서서히 진행돼온 알츠하이머가 급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다 전달했으니 이제 너희들의 일이다. 나는 잊어버리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다”고 양 감독은 말했다. 어머니 강정희씨는 지난 1월 세상을 떠났다.
다큐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이번 한국행에 함께한 남편 아라이 가오루에게 출연 소감을 물으니 “다큐멘터리 감독과 결혼할 때부터 각오했다”고 웃으며 답했다. 그는 “4·3 사건은 일본 식민지 책임과도 연결된 역사다. 일본인들이 외국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어진 과거라는 걸 영화를 통해 알게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영화 개봉과 함께 스크린으로 보여줄 수 없었던 카메라 뒤 이야기를 담은 양 감독의 에세이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마음산책)도 출간됐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