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쓴 정서경 작가. 티브이엔 제공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쓴 정서경(47) 작가는 사방이 통창인 빛이 가득한 공간에 앉아 있었다. 지난 17일 서울 홍대 앞 한 카페에서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드라마 속 세 자매의 첫째 오인주(김고은)가 떠올랐다. 인주는 막내 오인혜(박지후)가 보낸 300억원으로 거실 통창 너머 한강이 보이던 그 아파트에 입주했을까? 아니면 더 좋은 곳으로 갔을까? 정 작가가 말했다. “글쎄요. 인주에게 300억원을 남겨준 건 이젠 이 돈이 어떤 돈인지 잊지 않고, 돈의 무게를 아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어요.” 그러고는 친구가 자신에게 했다는 말을 전했다. “시청자도 12회 내내 주인공이 고생하는 걸 지켜보면서 함께 견뎠는데, 마지막에 모든 것을 뺏기면, 너무 한 거 아니니?” 정 작가는 “20억원이 생겼다가 (누군가에게) 뺏기고, 다시 700억원이 생겼다가 뺏기는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이 드라마를 집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인주에게 희망을 선물했듯, <작은 아씨들>은 그에게 ‘인기 드라마 작가’라는 타이틀을 안겨줬다. 이번 작품은 그의 두 번째 드라마지만, 영화계에서 그는 일찌감치 정평이 난 작가다.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부터 최근 <헤어질 결심>까지 박찬욱 감독 작품의 시나리오를 박 감독과 공동으로 써왔다. “드라마 문법은 여전히 모르겠어요. 일단 무작정 쓰기 시작했어요. 12편을 하나의 영화를 구성하는 느낌으로 썼어요. 3회가 특히 어렵더라고요.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동력을 찾는 게 힘들었어요.”
정 작가는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에서 줄곧 강한 여성을 내세워 왔다. 드라마 데뷔작인 2018년 <마더>(티브이엔)도 가정 폭력에 내몰린 아이를 구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는 이번 드라마에서 여성 서사를 확장했다. “처음부터 ‘주인공은 세 자매로 하고 싶다. 세 자매에 맞서는 최종 빌런도 여자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집필을) 시작했어요.” 오인주와 진화영(추자현)의 관계, 진화영과 원상아(엄지원)의 관계, 원상아와 오인주의 미묘한 관계 등이 얽히며 기존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인물 관계가 펼쳐진다. 특히, 오인주 캐릭터는 영화 <아가씨>의 숙희(김태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맏언니 역할을 맡은 김고은의 허영심과 정의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연기가 인상적”이라며 “<작은 아씨들>은 이런 여성 캐릭터를 잘 활용한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장르적 재미까지 더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오인주(김고은). 티브이엔 제공
정서경 작가는 이 드라마를 3년 전에 시작했다. 집필 도중 영화 <헤어질 결심> 시나리오를 썼다. 그는 이번 드라마 작업에 앞서 시놉시스를 쓰지 않았다. 시놉시스는 주제, 기획의도, 등장인물, 전체 줄거리 등이 간략하게 담긴 개요다. 등장인물과 전체 줄거리에 대한 설명이 빠지다 보니, 처음 대본을 받은 배우들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헷갈리기도 했다고 한다. 대본이 나올 때마다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틀에 박히지 않은 지점이 <작은 아씨들>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평소 그의 작품에 관심을 안 둔다는 박찬욱 감독도 <작은 아씨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좋아해 줬다고 한다. “이런저런 코멘트를 해주셔서 매번 묵살하느라 힘들었어요.(웃음)”
그는 작품마다 동화를 모티브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더>는 <헨젤과 그레텔>, <헤어질 결심>은 <인어공주>다. <작은 아씨들>은 여러 동화의 원형이 들어 있는데, 주로 〈분홍신〉 〈푸른 수염〉이라고 했다. 실제로 <작은 아씨들>을 보면 동화 느낌이 드는 장면이 있다. 원상아와 진화영 그리고 오인주가 푸른 난초 나무가 있는 지하실에서 대치하는 12회 마지막 장면은 신이 바뀔 때마다 동화책을 한 장씩 넘기는 느낌이다. 정 작가는 날 것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과 과한 판타지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현실과 환상 사이의 적절한 지점이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에서 호흡을 맞춘 류성희 미술감독의 미장센과 만나 동화처럼 그려졌다. 정 작가는 “마지막 장면은 처음부터 난실과 함께 지하실을 불태우고 싶었다. 세트장이어서 불가능하다고 해서 대안이 없었는데, 미술감독님이 염산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정서경 작가는 대사를 문어체로 써서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덕’에 그의 작품에선 늘 명대사가 쏟아졌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아가씨?>),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이다. <작은 아씨들>에서도 “대사마다 의미를 담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중 어떤 말은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기도 했다.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같은 대사다. 그는 “극 중 인물이 돈에 대해 수치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말이 상처가 되었다는 댓글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다음 작품을 쓸 때는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을 왜곡했다는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글로벌한 시장에서 드라마를 집필하며 더 세심하게 살피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극 중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원기선 장군(이도엽)의 “한국군 1명당 베트콩 20명을 죽였다” “한국 군인은 베트남 전쟁 영웅”이라는 대사 등이 문제가 되면서 이 드라마는 지난달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방영이 중단된 바 있다.
정 작가의 이야기꾼 인생은 2002년 자신이 연출도 했던 단편영화 <전기공들>을 시작으로 첫 공동작업인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졌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살아온 세월이 벌써 20년이 됐다. 그는 “느낌상 단 하루도 일하지 않은 날이 없다”며 “직업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산다”고 했다. “잠에서 깨면 ‘오늘은 뭐 쓰지?’라고 생각해요. 일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는 이번 주까지만 <작은 아씨들>을 이야기하고, “다음 주부터는 즐길 거예요”라고 말했다. 여행을 가느냐고 물으니, 무언가를 또 쓸 거라는 답이 돌아온다. 대본을 쓰는 일이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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