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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지리산 생존자 어머니는 말했죠…딸들아 맘껏 세상을 누려라”

등록 2022-09-23 02:36수정 2022-09-26 15:01

[짬] ‘프리즈 서울 2022’ 초청받은 김민정·김수연 자매

언니 김민정(왼쪽) 작가와 동생 김수연(오른쪽) 미술복원가 지난 9월2일 ‘2022 프리즈 서울’ 브이아이피(VIP) 공개행사에 나란히 참석했다. 갤러리 현대 제공
언니 김민정(왼쪽) 작가와 동생 김수연(오른쪽) 미술복원가 지난 9월2일 ‘2022 프리즈 서울’ 브이아이피(VIP) 공개행사에 나란히 참석했다. 갤러리 현대 제공
지난 9월 초 ‘단군 이래 최대 미술장터’로 불린 ‘2022 프리즈 서울’에는 세계적인 미술계 명사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그 가운데 주빈으로 참석한 한국인 자매가 있었다. 각자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느라 수년 만에 한국에서 ‘동침’을 한 이들에게 프리즈 서울은 남다른 감회를 안겨주었다.

“솔직히 자랄 때는 부모님 전력에 대해 잘 몰랐어요. 딸 셋과 아들 하나, 다들 공부를 곧잘 해서 판·검사를 꿈꾸기도 했는데, 정작 부모님은 예술 쪽으로 은근 밀었어요. 세째인 아들(김성진 전남대 의대 피부과 교수)이 법대에 가려고 할 때에야 ‘연좌제’라는 걸림돌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나이 들수록 점점 깨달아요. 부모님의 예술 디·엔·에이(DNA)가 우리에게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요.”

'한지 향불' 회화로 유럽을 비롯한 국내외 화단에서 호평을 받는 둘째 딸 김민정(60) 화가와 뉴욕에서 ‘손꼽히는 미술품 복원가’로 전문업체를 운영 중인 막내딸 김수연(53) 대표의 얘기다.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민정씨는 이번 프리즈에 출품한 한국 대표 화랑인 갤러리 현대의 전속작가로, 수연씨는 프리즈의 공식 미술품 관리위원으로 초청 받았다.

이들의 부모는 ‘빨치산 부부’로 평생 주시받았던 김봉철·고계연씨로 이젠 모두 고인이다. 모처럼 서울에서 같은 숙소에서 지내면서도 각자 일정으로 분주했던 탓에 자매를 따로 만나 남다른 가족사와 인생 개척기를 들어봤다.

자매의 부모인 김봉철·고계연씨는 ‘지리산 빨치산 출신’의 동병상련으로 인연을 맺어 1959년 처가인 경남 삼천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족 제공
자매의 부모인 김봉철·고계연씨는 ‘지리산 빨치산 출신’의 동병상련으로 인연을 맺어 1959년 처가인 경남 삼천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족 제공

‘빨치산 부모’ 고 김봉철·고계연
“연좌제 탓 법대 대신 미술 권유”

“엄마가 가끔 지리산에 살 때 봄이면 물봉선이 예뻤다는 말씀을 하시기는 했지만, 왜 산에 들어갔는지, 얼마나 고초를 겪었기에 발가락이 다 없어졌는지, 왜 그렇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는지, 두 분은 왜 낚시를 그리도 좋아하셨는지…, 자세한 사연은 훗날 엄마의 자전 에세이를 보고서야 알게 됐어요.”

어머니 고계연씨는 지난 2002년 <강물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한국 최고의 여성 낚시꾼 고계연의 인생 이야기>(강마을)를 펴내면서 ‘최후의 빨치산 할머니’로 주목을 받았다. 그때 책과 인터뷰로 그는 칠십 평생 처음으로 가슴에 품어왔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계연은 1932년 경남 삼천포에서 ‘고기룡 백화점’ 막내딸로 태어났다. 진주공립여중(현 진주여중고) 5학년 때 결핵으로 집에서 요양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던 둘째오빠가 인민군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아버지와 오빠는 인민위원회, 그와 동생은 학생동맹, 언니는 여성동맹 등으로 온가족이 감투를 받았다. 그해 8월 들어 전세가 뒤집혀 인민군이 후퇴하자, 아버지와 오빠들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가 지리산 산청으로 들어갔다. 여맹위원장 조복애 휘하에 있다가 1952년 봄 이현상 사령관의 남부군으로 옮겨갔다. 그즈음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하동 쯤에서 장티푸스 비슷한 병으로 돌아가셨고, 큰오빠도 산을 떠돌다 재귀열로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마침내 그해 겨울 그는 생포되었다. 동상으로 발가락이 다 망가져 지게에 실려 내려왔다. 광주 도청 앞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어머니 등 가족들의 탄원으로 포로생활 50여일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2002년께 어머니 칠순 기념으로 프랑스 여행을 함께한 네모녀가 옛 귀족들의 고성과 정원으로 이름난 서남부 르와르 밸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큰딸 김연희, 막내딸 수연, 어머니 고계연, 둘째딸 민정씨. 가족 제공
2002년께 어머니 칠순 기념으로 프랑스 여행을 함께한 네모녀가 옛 귀족들의 고성과 정원으로 이름난 서남부 르와르 밸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큰딸 김연희, 막내딸 수연, 어머니 고계연, 둘째딸 민정씨. 가족 제공
하지만 두 자매에게는 하산 이후 ‘빨치산 낙인’을 뒤집어쓴 채 결혼을 하고 4남매를 키워낸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었다.

‘고계연은 석방되자마자 썩어들어가는 발 수술을 받았다. 그때 우연히 문병을 온 남편 김봉철을 처음 만났다. 장흥 출신으로 소학교 교사였던 그 역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고 했다. 휴전 이후 이승만 정권의 경찰은 걸핏하면 좌익 일제소탕을 벌였다. 어느해 또 조짐이 있자, 발이 아파 혼자서는 걷기도 힘들었던 그는 합동통신 기자로 있던 김봉철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의 등에 업혀 무사히 도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일로 김봉철이 3년이나 옥살이를 한 줄은 몰랐다. 풀려난 그가 광주에서 인쇄소를 차리고 청혼을 했다. 아버지와 세 오빠와 남동생까지 전쟁통에 남자는 모두 떠나버리고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자신이 조카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망설였다. 하지만 27살 과년한 나이를 걱정한 어머니의 강권을 물리치기도 어려웠다. 1959년 그는 가난한 집안의 9남매 중 장남이자 6살 많은 김봉철과 결혼식을 올렸다.’ ‘고계연은 1970년대초 어느 해 겨울 밍크이불이 크게 유행할 때 1000개나 팔아 ‘화성이불’이란 고급이불집을 차렸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업 수완과 친화력, 산 생활에서 깨우친 생존력으로 포목까지 넓혀 30여년 고급이불집으로 키웠고, 지금은 큰딸(김연희)에게 물려줬다. 그 사이 이사를 마흔번쯤 했다. “애들을 데리고 얼마나 돌아댕겼는지 그 말을 어찌 다 하겠소. 그래도 애들 기 죽이지 않으려고 초등학교는 다 사례지오(명문 사립학교)에 넣었지요” 인쇄소를 차렸으나 요주의 인물로 찍혀 접어야 했던 남편은 고문후유증으로 1981년 쉰다섯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고계연은 어릴 때부터 오빠들 따라 낚시를 즐겼다. 산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떠올라 미칠 것 같을 때면 남편과 함께 낚시를 하며 생각을 흘려보내는 게 유일한 탈출구이자 낙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외국 여행을 가도 그를 맨먼저 낚시터로 데려간다.’ ‘그는 바둑만 하던 남편에게 훗날 아이들이 볼 수 있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했고, 늦깎이로 시작한 남편은 전남도전에서 최고상을 받고 국전에도 입선했다. 남종화의 거장인 의재 허백련가의 후손들과 교유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난 2003년 뉴욕 인근 자메이카 베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어머니 고계연(맨왼쪽)을 막내딸 수연씨와 둘째딸 민정씨가 지켜보고 있다. 가족 제공
지난 2003년 뉴욕 인근 자메이카 베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어머니 고계연(맨왼쪽)을 막내딸 수연씨와 둘째딸 민정씨가 지켜보고 있다. 가족 제공
둘째 민정씨 ‘한지 향불 회화’ 독창적
유럽서 호평…갤러리 현대 전속작가

지난 11일 홍대 앞에서 만난 민정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인쇄소에서 종이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 집안에는 아버지의 먹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엄마의 적극적인 지원과 격려로 서예와 수채화를 공부하며 작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엄마의 바람대로 1980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 민정씨는 그러나 19살 때 덜컥한 결혼이 순탄하게 풀리지 않으면서 그림도 삶도 포기할 뻔했단다. 그런 그에게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말라’는 용기와 함께 이탈리아행 편도 비행기표를 쥐여준 것도 어머니였다. 1991년 29살 때 한지 뭉치 하나만 들고 밀라노의 브레라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 그가 타국에서 화가로 정착한 계기도 ‘부모님의 힘’이라고 했다.

지난 9월10일 홍대 앞의 카페에서 만난 김민정 작가. 모교이자 아이들이 사는 곳이어서 서울에 오면 홍대 앞에 묵는단다. 김경애 기자
지난 9월10일 홍대 앞의 카페에서 만난 김민정 작가. 모교이자 아이들이 사는 곳이어서 서울에 오면 홍대 앞에 묵는단다. 김경애 기자
“유학 때 살던 집의 1층에 밀라노에서 유명한 화랑이 있었어요. 졸업반 때 1년간 무작정 그림을 들고가 주인 할아버지에게 보여줬어요. 그 무모한 끈기에 탄복했는지, 먼 나라에서 온 작은 여학생이 불쌍했는지 어느날 내 작품 하나를 전시해주셨는데 뜻밖에 팔렸어요. 유학 내내 생활비를 벌고자 커피 원두를 한국에 보내는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그무렵 강남의 유명 카페에 보내준 카푸치노가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으로 무역업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참이었어요. 하지만 돈을 돌보듯 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거절했죠.”

그렇게 예술가의 고행을 택한 그는 어느날 “내 안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지를 태우다 ‘자신만의 선’을 찾아냈다. 한지를 잘라내고 일일이 가장자리를 태워서 붙이는 공예적 기법으로 표현한 그만의 ‘한지 향불 회화’가 탄생한 것이다. 2000년대들어 이탈리아 최고의 상업화랑 카피소의 전속화가가 된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 토리노의 폰다치오네 팔라초 브리케라시오, 덴마크 코펜하겐의 스비닌겐 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 소장되었다. 그는 첫 화집의 맨 앞장에 ‘내 어머니에게’라고 적어 생전에 헌정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영국을 대표하는 아트북 출판사 파이돈(Phaidon)사의 에디터들이 뽑은 '세계 최고의 현대 미술 드로잉 100인'에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엄마가 포목점에서 천을 자르셨듯 나도 가위로 한지를 자르고 있더라고요. 두 손의 지문이 다 없어진 줄도 몰랐어요.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내 작품을 본 집안 어르신께서 ‘3대 할머니가 보인다’고 하셔서 오싹, 전율을 느끼기도 했죠. 4년 전 어머니가 떠나시니 더 더욱 ‘천직이다’ 깨달아요. 작품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시간이 아까워요.”

아티스트 북 ‘트레이스’에 실린 김민적 작가의 친필 노트. 갤러리 현대 제공
아티스트 북 ‘트레이스’에 실린 김민적 작가의 친필 노트. 갤러리 현대 제공
막내 수연씨 복원미술가로 성공
손꼽히는 뉴욕 복원업체 대표로

앞서 지난 3일 프리즈 서울 현장인 코엑스에서 만난 수연씨도 아무 연고도 없던 뉴욕에서 복원미술가로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배짱’ 역시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열정 덕분이라고 했다. “어릴 때 자다 깨어보면 엄마는 늘 일을 하고 있었어요. 엄마는 이불만이 아니라 직접 천을 짜서 팔기도 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다양한 색감과 눈썰미를 익힐 수 있었고요.”

어머니가 한사코 곁에 두고 싶어해 전남대 사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했던 막내딸은 대학원까지 마친 1992년 언니가 있는 이탈리아로 놀러갔다가 눌러앉아 피렌체의 복원미술대학원에 다시 입학했다. “전남대 은사인 신경호 교수님과, 광주비엔날레 초대 조직위원장으로 친분이 깊었던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께서 국내에 복원 전문가가 없다고 권유한 영향도 컸어요. 그런데 무엇보다 섬세한 고미술품 복원 작업이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지난 3일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 2022’ 전시장에서 김수연씨가 미술품 복원 주문 고객이기도한 뉴욕의 유명 갤러리스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경애 기자
지난 3일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 2022’ 전시장에서 김수연씨가 미술품 복원 주문 고객이기도한 뉴욕의 유명 갤러리스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경애 기자
대학원 졸업 뒤 현지에 남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 같은 고미술품 복원을 했던 전문업체에서 4~5년간 경력을 쌓은 그는 근현대미술 복원도 배우고 싶어 뉴욕에 갔다가 6개월 만에 뜻밖의 기회를 얻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3대째 운영해온 복원업체의 대표가 은퇴를 하면서 저를 포함해 3명을 공동 파트너로 지명했어요. 그런데 20여년 경력의 두 사람이 나가버려 서른살에 혼자 떠안게 됐죠. 그때 할 수 있다고 믿어주고, 경제적으로 밀어주신 것도 엄마였어요. 덕분에 90%으로 백인 상류층 상대이고 화랑가는 유태인이 독점하고 있는 뉴욕에서 거의 유일한 동양인 복원업체 대표가 될 수 있었죠. 애초 계약한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 꼼꼼하게 복원해준다고 소문이 나면서 3~4년 만에 자리를 잡았고요.”

하지만 그가 어머니에게 한 가장 큰 효도는 ‘박사학위를 세 개나 가진 멋진 영국계 사위’와 ‘외할아버지를 꼭 닮은 외손자’를 안겨드린 것이었단다. “2003년 갓 태어난 손주를 보러 뉴욕에 오셨을 때 어머니가 자메이카 베이에서 바다낚시로 1m에 무게 10kg짜리 농어를 잡고는 정말 기뻐하셨죠.” 실제로 이듬해 한 잡지 인터뷰에서 고계연은 “21살 때 토벌대의 즉결 총살로 구덩이에 파묻힐 뻔했던 내가 일흔 살 넘도록 살아남아 뉴욕 앞바다에서 그렇게 큰 고기를 잡아올릴 줄, 그때 지리산에서 쫓겨다니던 동지들이 짐작이나 했겠어요? 인생은 참 신비해요”라고 감회를 토로하기도 했다.

뉴욕에서 미술품 복원전문업체를 운영중인 김수연씨가 작업장에서 직원들과 작품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김수연씨 제공
뉴욕에서 미술품 복원전문업체를 운영중인 김수연씨가 작업장에서 직원들과 작품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김수연씨 제공
자신의 주고객인 뉴욕의 유명 갤러리들이 프리즈 서울에 대거 출동한 까닭에, 전시장에서 한걸음 옮길 때마다 인사를 나누기 바쁘던 수연씨는 파리에서 열리는 또다른 대규모 아트페어에 초청받아 7일 먼저 출국했다.

민정씨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세계적인 예술서적 전문 출판사(SYL)와 2년간의 작업 끝에 아티스트 북 <트레이스>(TRACES)를 300권 한정판으로 펴냈다. 갤러리 현대는 프리즈 서울과 맞물려 지난 14일까지 그의 아티스트 북과 다양한 연작을 엄선한 팝업 전시도 열었다. 책에는 그가 직접 선정한 대표작 39점과 철학적 사유가 담긴 아티스트 노트도 함께 실었다.

어머니 고계연은 자전 에세이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다. “내 딸들아, 마음껏 이 세상을 누려라!”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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