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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 99.99% 손톱 금박 2개 붙였더니…1300년 전 ‘쌍조 그림’ 펼쳐졌다

등록 2022-06-16 09:02수정 2022-06-19 09:04

2016년 경주 동궁과 월지 유적서 ‘선각단화쌍조문금박’ 출토
머리카락보다 가는 선으로 새겨…마이크로 단위 세공술 눈길
동궁 월지 유적에서 나온 8세기 통일신라의 쌍조문 금박 공예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동궁 월지 유적에서 나온 8세기 통일신라의 쌍조문 금박 공예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꽃과 새가 보입니다. 윤곽선이 머리카락 굵기보다 가늘어요! 어떻게 새겼지?”

현미경을 통해 금박을 본 연구원들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탄성을 쏟아냈다. 1300년 전 신라 장인이 만든 초소형 캔버스가 막 눈앞에 출현한 참이었다. 손톱보다 작은 금박 2점을 살살 펴서 현미경 아래 놓고 관찰했더니 0.05㎜ 굵기의 초미세 선으로 새긴 놀라운 그림이 각각 나타났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무리 속에 비둘기가 내려앉은 자태가 생생했다. 두 금박 그림을 조심스럽게 붙여보니 암수 한쌍이 서로 마주보는 정교한 쌍조문도가 재현됐다. 가로 3.6㎝, 세로 1.17㎝ 크기밖에 안되는 순금판 화폭에 맨눈엔 보이지 않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세공술로 당대 신라인이 꿈꾼 자연의 이상향을 펼친것이다.

이 초소형 금박 작품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배)가 지난 2016년 경주 월지 신라 동궁유적의 건물터를 조사하다 발굴한 8세기께 통일신라 유물이다. 연구소는 발굴 이듬해인 2017년부터 올해까지 금박을 보존처리하며 정밀 분석한 결과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세공술로 빚어진 초정밀공예품으로 확인됐다고 16일 밝혔다. 미술사 전문용어로는 ‘선각단화쌍조문금박’(線刻團華雙鳥文金箔)이라고 명명한 유물이다. 오목새김으로 숱한 꽃무리 속에 두 마리의 새가 마주보는 형상을 만든 금박 작품이란 뜻이다. 연구소 쪽은 2017년 보존처리 작업을 시작해 5년여 만에 실체를 밝혀낸 이 명품을 이날 오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내보였다.

동궁과 월지 ‘나’ 지구 북편 유적에서 나온 8세기께의 신라 금박 조각. 구겨진 채 나온 금박 조각을 펴본 결과 꽃과 새가 그려진 초소형 화폭이었음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동궁과 월지 ‘나’ 지구 북편 유적에서 나온 8세기께의 신라 금박 조각. 구겨진 채 나온 금박 조각을 펴본 결과 꽃과 새가 그려진 초소형 화폭이었음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연구소 쪽 얘기를 종합하면, 금박 2점은 발굴 당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구겨진 모양새로 나왔다. 서로 20m가량 떨어진 채로 각각 발견됐는데, 나중에 한몸의 작품임이 드러났다. 연구원들이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현미경을 보며 핀셋으로 금박을 펼치면서 두점 모두 비슷한 꽃과 새 도상이 새겨졌음을 알게됐고, 서로 붙여본 결과 거의 대칭구도로 꽃과 새 도상이 배치된 한 작품이었다가 중간 부분이 떨어져나간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동궁과 월지 나지구 북편 유적에서 나온 8세기께의 또다른 신라 금박 조각. 구겨진 채 나온 금박조각을 펴본 결과 꽃과 새가 그려진 초소형 화폭이었음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동궁과 월지 나지구 북편 유적에서 나온 8세기께의 또다른 신라 금박 조각. 구겨진 채 나온 금박조각을 펴본 결과 꽃과 새가 그려진 초소형 화폭이었음이 드러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박은 순도 99.99%의 순금이다. 이 순금 0.3g을 두께 0.04㎜로 얇게 펴서 가로 3.6㎝, 세로 1.17㎝ 크기의 초소형 화폭을 만들고 정이나 끌 형태의 정교한 미세 도구를 사용한 ‘조금’(彫金) 기법으로 새와 꽃을 조밀하게 새겼다. 머리카락 굵기(0.08㎜)보다 가는 0.05㎜ 이하 굵기 각선으로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에 새 두 마리를, 새 주위에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묘사된 꽃무리 문양들인 ‘단화’(團華)를 새겨넣었다. 꽃술과 새의 깃털들을 간격이 0.1mm도 안되는 무수한 선으로 묘사했지만 겹치는 부분은 없었다. 새의 정체는 조류 전문가들에게 자문한 결과 튀어나온 이마, 날개와 몸체의 특징 등에서 멧비둘기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연구소 쪽은 “현재 알려진 당대 전세계 고대 공예품들 가운데 이 금박만큼 미세 가공술을 쓴 전례가 없다”면서 “통일신라 금속공예술의 정수”라고 단언했다.

금박그림은 눈으로는 구체적 형상이 거의 보이지 않고 돋보기나 현미경으로만 확인된다. 신라 장인들은 이 초미세 그림을 어떻게 새겼던 것일까. 연구소 쪽은 김용운 국가무형문화재 조각장 등 현직 장인들에게 같은 크기의 금속제 판으로 선을 새겨 똑같이 그려보게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확대경을 보며 매우 가는 철필 등으로 머리카락 굵기의 미세한 선은 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장인처럼 자유자재로 선을 놀려 꽃과 새의 풍경을 그리는 건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다고 한다. 당대 일류 장인들이 뛰어난 세공감각으로 확대경과 미세 철필 등의 도구를 써서 새겼으리란 추정만 할 수 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김용운 조각장은 “지금 장인들이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금박에 새긴 쌍조문도를 흰 화면에 검은 윤곽선으로 그대로 옮긴 그림. 서로 바라보는 새 두 마리의 자태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박에 새긴 쌍조문도를 흰 화면에 검은 윤곽선으로 그대로 옮긴 그림. 서로 바라보는 새 두 마리의 자태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박 위에 그린 꽃잎 문양의 세부 선을 머리카락 굵기와 비교한 확대사진. 머리카락보다 새김선이 가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박 위에 그린 꽃잎 문양의 세부 선을 머리카락 굵기와 비교한 확대사진. 머리카락보다 새김선이 가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박에 담긴 단화 쌍조문은 3~4세기 이란 지역의 사산조와 중앙아시아 소그드 미술에서 전래된 것이다. 꽃과 새의 세부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됐다는 점에서 신라 특유의 도상으로 진화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공예사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가 확보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컷으로 추정하는 오른쪽 새의 깃털을 암컷으로 보이는 왼쪽 새보다 풍성하게 표현하고, 몸집 크기와 꼬리 깃털 방향도 뚜렷한 차이가 나게 형상화한 것도 이채롭다.

금박의 사용처는 어디였을까. 현재로선 비교할 만한 사례가 없지만 유물 형태로 볼 때 사다리꼴 단면을 가진 기물 마구리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소 쪽은 “사람 눈으로는 식별조차 힘든 미세한 도상을 새긴 건 과시하려는 장식 요소를 넘어 신에게 바치려는 봉헌물 성격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금박 유물은 17일부터 10월31일까지 경북 경주시 불국로에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존고 전시실에서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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