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쌍둥이 동생 영옥(왼쪽·한지민)과 언니 영희(오른쪽·정은혜)가 만나는 장면. 티브이엔 제공
“영옥아~!” 제주공항에서 두 팔 벌려 뛰어오는 영희(정은혜)는 영옥(한지민)의 언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티브이엔) 1회부터 영옥한테 쉴 새 없이 전화를 했던 인물이다. 영옥은 매일 혼자 몰래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물질을 할 때도 휴대전화를 갖고 갔다. 그 행동 때문에 푸릉마을에선 외지에서 온 영옥을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애가 있다더라”, “남자가 있다더라”. 지난 22일 14회 방송에서 영옥의 비밀이 드러났다. 영옥은 영희를 보고 당황해서 아무말도 못하는 남자친구 정준(김우빈) 선장한테 말했다. “많이 놀랐나 봐. 나랑 쌍둥이 언니 영희. 다운증후군. 발달장애 1급.”
시청자들은 다른 의미에서 놀랐다. 다운증후군 영희로 등장한 배우가 실제 다운증후군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티브이 미니시리즈에서 장애가 있는 배우가 주조연급으로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장애인 역할은 비장애인이 연기로 대신 표현해왔다. 제작진은 배우들 사이에 잘 스며들 수 있을까 등 여러 고민을 했을텐데, 정은혜는 이들과 처음부터 호흡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우리들의 블루스> 제작진은 2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희경 작가가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에피소드에 녹이고 싶어했다. 그 과정에서 이란성 쌍둥이인데 한명은 다운증후군이고 한명은 비장애인으로 태어난 사연을 듣게 됐다. 다운증후군 관련 자료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정은혜 작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노희경 작가는 외국에는 장애 연기를 장애인이 직접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왜 없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영희는 <우리들의 블루스>(14~15회)에서 서울의 시설에서 지내다가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1주일 동안 영옥과 함께 제주에서 지내게 된다. 정은혜는 한지민과 함께 사실상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정은혜는 영희를 멀리해왔던 영옥을 2년 만에 만난 반가움과 서운함, 영희를 보고 놀라는 사람을 향한 불편함 등 여러 감정을 내보인다. 생선 손질을 하는 푸릉마을 사람들 틈에서는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다. 무려 김혜자, 고두심 사이에 앉아서도 이질감이 없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희(가운데·정은혜)가 처음 본 푸릉마을 사람들과 생선 손질을 하고 있는 장면. 티브이엔 화면 갈무리
정은혜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사실감을 살렸다. 따뜻한 드라마답게 모두의 사랑과 배려가 그와 함께했다. 제작진은 “노희경 작가가 1년 정도 정은혜와 소통했다. 이제는 됐다는 확신이 선 다음에 대본 집필에 들어갔다. 또 정은혜가 연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보는 등 친해지는 과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나자마자 촬영을 한 게 아닌 것이다.
노희경 작가는 정은혜의 실제 모습을 영희한테 투영했다. 정은혜는 2014년부터 캐리커처를 그려온 현역 화가다.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경기 양평의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2016년부터 초상화 그려주기를 했고, 지금껏 노희경 작가를 포함해 4000여명의 얼굴을 그려 전시한 <니얼굴> 작가로 유명해졌다. 극중에서 영희도 그림을 그린다. 영희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가는 차 안에서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을 부르며 뜨개질을 하는 설정도 정은혜가 평소 좋아하는 것들이다. 제작진은 “지금 영희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이 정은혜와 똑같다. 노희경 작가가 정은혜의 성향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지난해말 제주 촬영 때부터 소셜미디어(SNS) 아이디를 ‘한지민 닮은 은혜’로 설정해둔 정은혜는 “드라마 방송 때까지 ‘출연 비밀’을 지키려고 애썼다”고 전했다.
‘다운증후군’ 정은혜(두번째줄 맨왼쪽) 작가를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과 함께 소개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티브이엔 제공
영희에 진심인 <우리들의 블루스>는 과장된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정은혜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며 장애인 가족이 겪는 상처와 우리가 알아야 할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는다. 영희라는 존재로 영옥의 삶도 사라졌다. 영희를 부양해야 하는 부담감에 결혼을 꿈조차 꾸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 영희를 지하철에 두고 내린 적도 있다. 정준처럼 ‘우리’도 “장애인을 처음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어서” 당황한다. 무턱대고 수많은 ‘영희’를 “모자란 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극중 영희를 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모카라떼와 호두파이를 알아듣지 못하면 다시 한번 천천히 이야기해준다. 물고기를 물에 씻는 행동을 궁금해하면 차근차근 알려준다. 드라마에서 영희는 특별한 배려를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한번 더 귀 기울이면 되는 사회구성원인 것이다. 극중 해녀 혜자(박지아)의 말처럼. “나 손녀는 자폐야. 말을 안해서 그렇지. 한 집 건너 한 집 다 그래. 그거 별거 아냐.”
2005년 영화 <사랑해 말순씨>에 다운증후군 배우 강민휘가 출연했고, 2018년 뮤지컬 <위대한 쇼맨>에서 왜소증 배역을 왜소증 배우 김유남이 연기했다. 그리고 2022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정은혜가 나왔다. 문화는, 사회는 더디지만 변하고 있다.
2020년 캐리커처 작가 정은혜의 특별한 일상을 기록해 국내외 영화제에서 초청받은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감독 서동일)도 오는 6월23일 개봉한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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