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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영 작가의 2017년작 원작 단편소설을 읽은 이들에게, 티브이엔(tvN) 드라마 <살인자의 쇼핑목록>(2022)은 다소 당혹스러운 작품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향한 관음증적인 호기심과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과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여성화자 ‘나’는, 드라마판에 와서는 기억력과 두뇌 회전이 비상하고 심성이 착하지만 과거의 범죄 피해의 악몽에 시달리는 남성화자 ‘대성’(이광수)으로 바뀐다. 원작 소설 속 ‘나’는 마트에 방문한 고객들의 쇼핑목록을 통해 그들의 삶을 추측하는 비릿한 쾌감을 즐기는 사람인 데 비해, 드라마 속 ‘대성’은 자신과 엄마 명숙(진희경)의 안녕을 위협했던 범죄자에 대한 기억 때문에 진실을 밝히는 데 집착하는 사람이다.
관찰자와 살인자 사이의 음습하지만 치열한 두뇌 싸움이 팽팽하게 전개되었던 소설의 세계를, 드라마 제작진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를 지키고 싶다는 선의로 가득한 세계로 변주한다. 원작의 깊은 어둠을 즐기던 이들에게는 다소 아쉽고 무난한 변주가 되겠으나, 이와 같은 방향 전환은 예기치 않은 소득을 낳았다.
드라마 <원티드>(2016)의 한지완 작가,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2016)의 이언희 감독이 호흡을 맞춘 <살인자의 쇼핑목록>이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당하는 위협과 폭력이다.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인 경아(권소현)는 제집 문고리에 자꾸 불쾌한 물건들이 담긴 쇼핑백을 걸어 두고 가는 정체불명의 스토커에게 시달린다. 경아는 불안함을 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가 당하는 피해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알게 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누가 아가씨를 좋아하나 보네. 아가씨 위해서 가져다 둔 거 아니야? 그냥 잘못 걸어 둔 거 아닐까? 사람들의 무심함에 경아는 절규한다. 대도시의 사람들은 이제 이웃에 누가 사는지,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크게 관심이 없다. 주변 사정에 지나치게 빠삭하면 마트의 공산 코너 담당 라희(김미화)처럼 성가신 사람 취급을 당하고, 사람들은 상대가 어디 가서 내 이야기를 하고 다닐까 두려워 속내를 감춘다. 경아처럼 곤경에 처한 이웃의 사연을 깊게 알았다간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까 싶어 멀리하기 일쑤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방치된 건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마트의 단골손님인 서율(안세빈)은 항상 꾀죄죄한 행색에 구겨진 태권도복 차림이지만, 동네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애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다며? 애아버지는 일하느라 바빠서 애 잘 못 챙기는 것 같고. 그래도 애가 똘똘하고 씩씩하니 얼마나 다행이야. 제 아버지가 맨날 술을 달고 산다고 아버지 대신 소주 심부름 하러 온 거 봐. 태권도복 안쪽 소매는 온통 어딘가에 긁힌 자국이나 손목이 꽉 잡힌 멍, 물집으로 가득한데, 아이가 적극적인 학대를 당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애아버지인 부동산 사장 천규(류연석)가 사람이 좋아 보여서,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항상 인사성 좋게 웃고 이웃들을 반기는 사람이라서, 다들 천규를 크게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온 애엄마한테 맨날 화장품도 종류별로 사다 안겨주는 자상한 남편이던데, 그렇게 잉꼬부부로 살다가 아내가 아파 누워 있으니 애아버지 혼자 힘들겠지.
드라마는 비혼여성과 아동, 결혼이주여성을 넘어, 여성 자영업자, 이혼여성과 비수술 트랜스여성 같은 다양한 층위의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사회적 위협을 폭넓게 돌아본다. 마트 사장 명숙은 과거 자신과 아들 대성이 함께 잡은 위조지폐범 춘섭(장원영)에게 보복 폭력을 당했다. ‘교도소에 있던 시절 여자와 어린아이에게 당했다고 다른 재소자들로부터 조롱을 당해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트의 야채 코너를 담당하고 있는 통칭 ‘야채’(오혜원)는 재결합을 강요하는 전남편의 주거침입과 폭행, 성범죄 시도와 살인미수에 시달린다. 과거 가족들에게 커밍아웃 했다가 전환치료 위협과 폭력에 시달렸던 성윤(박지빈)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안의 돈을 들고 도망갔다가 절도죄 전과가 생겼다. 남의 일에 깊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무례한 일이라 여기는 도시 속에서, 이웃들의 관심은 딱 적당히 걱정만 하다가 속 편한 결론을 내리는 지점에서 멈추기 일쑤다. 명숙과 대성, 야채와 성윤의 사정은 결례의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의 영역으로 한발짝 걸어 들어가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시민들은 익명성 속에서 원자화되어 가는데 행정력은 아직 각기 다른 소수자들을 상세히 챙길 만큼 미치지 못하는 21세기의 대도시에서, <살인자의 쇼핑목록>은 일견 시대착오적인 ‘가족 같은 이웃’이라는 가치를 해법으로 꺼낸다. “앞으로 우리 마트의 차별화 전략은 가족이야. 아날로그하고 레트로하게,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느껴지는 가게, 정 없는 비대면 배송이랑은 아예 가는 길이 다른 거지.” 어릴 때부터 셈이 빠르고 기억력이 비상했던 대성은, 각종 배달·배송 서비스와 경쟁하느라 존폐의 위기에 몰린 마트를 살리기 위해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꺼낸다. 마트를 방문하는 고객들의 이름과 주소를 빠삭하게 외우고 있는 재능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겠다는 전략은, 뜻하지 않게 주변 사람들의 속사정을 파악하고 보듬는 결과를 낳는다.
<살인자의 쇼핑목록>이 해법으로 제시한 가치가 과연 유효한 것인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집값이나 재개발 이슈를 두고 보수화되기 쉬운 대도시 마을 공동체가 과연 성윤과 같은 비수술 트랜스여성을 편견 없이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결혼이주여성의 안녕까지 챙길 수 있을까?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개개인의 선의와 주민 간의 정이라는 전근대적인 가치로 해결할 수 있을까? 다소 기만적인 판타지를 해법으로 제시했음에도, 드라마판 <살인자의 쇼핑목록>이 제기한 ‘돌봄과 안전의 공백 속에 방치된 사회적 소수자들의 안전’이라는 질문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지, 드라마보다 더 나은 답을 도출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