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일제 총독관저가 기원…‘83년 최고권력 공간’ 청와대 비사

등록 2022-05-12 04:59수정 2022-05-12 09:39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복궁 후원 일제 총독관저가 기원
우여곡절 끝 해방 6년 전에야 완성

전쟁 사흘만에 들이닥친 김일성
3차례 머물렀지만 집기 안 건드려
프란체스카 여사 회고담에
“경무대 내것 되리란 확신” 풀이
1910년부터 1939년까지 1~7대 조선총독의 거처였던 서울 남산 자락의 왜성대 관저. 해방 뒤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50~60년대 구체적인 철거 시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0년부터 1939년까지 1~7대 조선총독의 거처였던 서울 남산 자락의 왜성대 관저. 해방 뒤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50~60년대 구체적인 철거 시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오늘로써 청와대 대통령 시대가 끝납니다.”

지난 9일 청와대에서 마지막 퇴근을 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환송 인파 앞에서 외친 말은 무게감이 있는 선언처럼 들렸다. 1939년 9월20일 창씨개명으로 악명 높았던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1874~1955)가 조선 왕조의 정궁 경복궁의 후원에 경무대 새 관저를 세우고 입주하면서 비롯된 최고 권력 공간의 83년 역사(정확히는 82년8개월)가 마침표를 찍었다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1939년 9월은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반격이 본격화하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발발한 시기였다. 불안한 국제 정세가 가장 큰 이슈가 된 상황이라 총독의 새 관저 건립 소식을 당대 언론들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1939년 9월21일치 <동아일보> 2면을 보면 경무대 총독 관저 낙성식 기사와 사진이 보인다. 일본 신사에서 파견된 신관이 흰옷을 입고 관저 입구에서 줄줄이 부적을 달아놓고 기원 의식을 올리고 있고, 그 뒤에 총독부 관료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에 덧붙은 기사는 2년 동안 계속되어 48만원의 공비로 준공된 새 총독 관저의 화려한 낙성식이 9월20일 오전 11시부터 미나미 총독과 총독부 2인자 오노 정무총감, 각국 과장 참여 아래 거행됐으며 이틀 뒤인 22일 미나미 총독 부처와 고토 비서관 일가족이 새 관저와 관사에 이전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1993년 10월 철거되고 있는 청와대 옛 본관. 1939년 9월20일 새 총독관저로 낙성된지 54년만에 사라졌다. 옛 본관은 20세기 초 일본 전통 지붕 양식과 서구의 모던한 입방체 건축이 결합된 건축물이었다. 일제 공공기관 관저들의 권위적인 양식을 본떠 지었다. 1993년 8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전격 철거됐다. 현재 터엔 흙을 돋운 언덕과 본관 들머리 진입 시설(캐노피) 지붕의 꼭지 장식 절병통이 남아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93년 10월 철거되고 있는 청와대 옛 본관. 1939년 9월20일 새 총독관저로 낙성된지 54년만에 사라졌다. 옛 본관은 20세기 초 일본 전통 지붕 양식과 서구의 모던한 입방체 건축이 결합된 건축물이었다. 일제 공공기관 관저들의 권위적인 양식을 본떠 지었다. 1993년 8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전격 철거됐다. 현재 터엔 흙을 돋운 언덕과 본관 들머리 진입 시설(캐노피) 지붕의 꼭지 장식 절병통이 남아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새 관저를 세간의 화젯거리로 만든 건 <조선일보>였다. 미나미가 입주한 지 열흘이 지난 그해 10월3일치 <조선일보> 1면에 새 관저 단독 탐방 기사를 실었다. 조선인을 병사와 노동자로 징용하는 강제동원 정책이 노골화하던 시기였다. 미나미 총독의 입주를 축하하면서 작성한 기사는 ‘경무대 송림을 도장 삼아 근엄하게 보건의 일과를 보낸다’는 큰 기사의 제목과 ‘노총독의 새 관저 생활 방문기’란 소제목을 달았다. 미나미 총독의 경무대 관저 입주를 축하하기 위해 방응모 당시 <조선일보> 사장과 이훈구 주필이 과일 선물을 들고 찾아가 인사하며 나눈 대화와 경무대 내부의 풍경, 거기서 바라본 경성의 풍광을 소개하고 있다. 기사는 ‘홍안백발’의 남 총독(미나미 총독)이 언제나 마찬가지로 활기 있게 일행을 맞이했고, 진귀한 초목과 석등이 있는 정원과 진해에서 가져온 금붕어, 잉어가 노는 연못, 관저 뒤쪽에 있는 백악산 기슭 산책로까지 구경시켜줬다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총독은 다시 발을 옮겨 구내를 구경시켜주겟다고 뒷산록으로 안내한다. 정원을 앞으로 돌아 뒷산록 구름다리를 올라가니 전일 경무대 뒤에 잇던 조선 건물을 예다 옮겨짓고 … 육각정에 올라서니 나무의 바다 같은 송림(松林)을 건너 남산이북의 장안 일대가 눈아래 보여 조망이 매우 좋았다.”

1931년 일본 육군대신 재직 시절의 미나미 지로. 5년 뒤 조선 총독에 취임한다. 퍼블릭 도메인
1931년 일본 육군대신 재직 시절의 미나미 지로. 5년 뒤 조선 총독에 취임한다. 퍼블릭 도메인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권력 공간 청와대의 기원은 사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결정적인 배경이다. 1926년 경복궁을 가로막고 총독부 청사가 완공된 뒤 여전히 회현동 근처 남촌의 왜성대 관저에서 머물던 총독이 출퇴근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경호상의 불편함도 있어 1930년대 중반 이전 방침이 결정되었지만 계속 공사가 늦어졌다. 곡절 끝에 미나미 총독이 부임한 1937년 착공했지만, 중일전쟁에 따른 물자 부족과 전시 경제 통제로 1938년 한차례 공사가 중단됐다가 1939년 9월20일 일본 신관이 참석해 전통 신도의 기원 예식을 올리면서 관저가 낙성됐다. 500년 조선 왕조의 위엄과 기품이 서려 있는, 나라의 법궁인 경복궁의 상징 공간에 관저가 들어간 데는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위력도 사실상 단박에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총독부 청사 옆 서촌과 북촌에 일본인들의 사택촌과 경성의전 병원 등의 관공서가 확실히 들어선 뒤인 1939년에, 그러니까 해방되기 불과 6년 전에 경무대 관저가 완성된 건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공간적으로 조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상징적 작업이 해방을 불과 6년 남겨 둔 시점에서야 최종적인 마무리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청와대 관저는 이런 일제의 상징적 공간 침탈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를 증언하는 역사적 증거물로서도 의미가 있다.

미나미 이후 1942~45년 총독으로 재임한 고이소 구니아키와 아베 노부유키는 바로 이 관저에서 인력 및 물자 공출령, 징병령, 정신대 동원 등 최후 발악기의 강제동원과 착취 정책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관저와 용산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는 한반도 수탈과 침탈의 양대 중추 거점이었다. 조선군 사령관 출신 미나미는 부하들이 지키는 용산의 조선군사령부 또한 통치의 텃밭으로 활용했다. 총독 관저와 사령부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방 뒤 총독 아베가 집기를 불태운 관저를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그대로 사용한다. 이승만이 뒤이어 경무대를 차지했고, 한국전쟁 개전 때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은 세차례 서울을 방문해 경무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생전 지인들에게 털어놓은 회고에 따르면, 김일성은 내부 가구와 집기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전한다.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백선엽(1920~2020)은 이에 대해 2016년 펴낸 회고록에서 “권력에 민감했던 김일성이 ‘경무대가 곧 내 차지’란 생각에서 아끼고 보존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풀이했다.

1968년 북한 정권은 특수부대를 보내 청와대 습격 작전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심화된 남북 정권의 분단 갈등은 관저를 더욱 민심과 동떨어진 권력의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이런 비사들은 청와대 공간의 역사가 단순한 역대 대통령들의 통치사가 아니라 일제 침탈사의 본류에서 비롯돼 분단 시대로 이어진 한반도의 험난한 현대사 자체였음을 일깨우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