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JTBC 제공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무안해지는 날이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아침에 일어나 만원 전철을 타고 출근해서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고, 성실히 일했는데도 삶에 아무런 의미도 더해지지 않은 듯한 날이 있다.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쓸쓸하고도 평범한 날들을 그리며 공감을 얻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수원 근처” 산포시에서 서울까지 통근하는 염씨 세 남매인 기정, 창희, 미정이다. 리서치 회사에서 근무하는 기정(이엘), 편의점 점포 관리를 맡은 대리 창희(이민기), 신용카드 회사 계약직 직원인 미정(김지원)은 장거리 통근 시간, 쌓여가는 말, 존중받지 못한 인간관계 속에서 지쳐간다. 일 끝나고 친구들과 술이라도 마시는 날이면 강남역에서 모여서 택시비를 갹출해서 타고 가고, 주말이면 집의 밭일을 돕는 세 남매의 일상에는 블랙코미디 같은 애환이 어려 있다.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드라마 화면 갈무리
물리적 피로보다 더 힘든 건 아무도 나를 절실히 원하지 않는다는 감정이다. 직장 내 모든 여직원에게 나눠주는 로또 한 장을 나만 받지 못하는 거나, 친하다고 여겼던 동료들이 나만 빼고 괌 여행을 가는 일 같은 건 그 자체로는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쌓여갈 때 냉대받았다는 느낌이 스며든다. 세 남매 중에 가장 말이 적고 내성적인 미정에게는 이런 차가움이 심장을 더욱 아프게 찌른다. 그런 미정이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얻은 건 동네에 흘러들어온 정체 모를 구씨(손석구)를 만났을 때다. 구씨는 매일 소주 네 병을 마시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 같다. 어느 날 밤, 미정은 자기만큼이나 쓰레기 같은 기분을 견디며 사는 구씨에게 당당히 선언한다.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어.(…)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나를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JTBC 제공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JTBC 제공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물론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다. 그리고 여기 깔린 전제가 바로 다음 대사다. 우리는 “사랑”으로만은 안 된다는 것. 판타지 성격을 띤 로맨스 <또! 오해영>, 삶에 지친 사람들끼리 연민을 나눈 <나의 아저씨>를 거쳐서 박해영 작가가 다다른 지점이 이곳이다. 대중적 인기와 비평적 찬사를 받은 이 작품들에서도 채워지지 않은 젊은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약혼자에게 파혼당하며 “너 밥 먹는 것도 꼴 보기 싫다”는 말을 들은 해영(서현진), 파견직 사무 보조로 일하며 그림자처럼 숨어서 살아가는 지안(이지은), 모두 열심히 살았지만 삶에서 멸시당한 이들이었다. 여기에는 세대를 아우르며 시대적인 공감을 부른 힘이 있었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모두가 이런 쓸쓸함을 느꼈고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배우 김지원 JTBC 제공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배우 손석구. JTBC 제공
하지만 역설적으로 광범위한 공감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약점이기도 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웃집 여자에게 스탠드를 선물하며 “있던 거야”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도경 같은 남자는 멋지지만, 내 열등감을 자극한 전 약혼녀를 두고 나를 선택한 사랑만으로는 마음속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는 한 단계 나아가서 이성적 사랑 없이 서로 돕는 따뜻한 사이를 그렸지만, 동훈(이선균)과 지안 사이의 관계 역학은 성별, 연령, 삶의 경험, 계층이라는 면에서 같은 선상에 있지 않았다. 힘들 때 타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은 모두에게 있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생기는 수직적 힘의 불균형은 완전히 지우기 어려웠다.
<나의 해방일지>는 이런 지적에 대해 작가가 숙고해서 내놓은 대답 같다. 좋아했던 남자에게 함부로 돈을 떼먹혀도 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약자인 미정은 충만해지고 싶기는 해도,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다. “높이 받들어져 우러러보는” 추앙을 받고 싶다. 응원을 주고받으며 봄이 되면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7화에서 구씨가 라면을 끓여주며 미정을 “추앙”하면서 했던 고백, “넌 나를 쫄게 해”는 미정의 갈망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도 겁먹게 만드는 힘이 서로 추앙하면서 생겨버렸다.
미정과 구씨가 서로 존재를 인정하는 과정이 해방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해방은 우리를 위에서 억누르는 것으로부터 힘 있게,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이다. 우리는 그냥 살아가는 것뿐인데,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려는 것뿐인데 왜 자꾸 아래로, 땅 밑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러기에 서로를 계속 높이 끌어올려 주는 추앙이 필요하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자신이 만든 한계를 넘어서려는 박해영 작가의 ‘해방일지’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수모에서 벗어나 자유에 가까워질 것이다. 같이 손을 잡고 위로 같이 올라갈 때,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김 없는 행복 속에 나란히 설 것이다.
박현주 작가 겸 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