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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아픈 사람 아무에게나, 정여울의 ‘아무는 글쓰기’

등록 2022-04-16 02:34수정 2022-05-09 09:17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
<끝까지 쓰는 용기> 정여울 작가 인터뷰
사진=류우종 기자
사진=류우종 기자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일, 생각보다 쉽지 않다. 좌절하기는 오히려 쉽다. 희망이 어렵다. 비판하는 건 쉽다. 격려가 어렵다. 상처받기도 쉽다. 회복은 쉽지 않다.그냥 내버려두면 삶은 ‘쉬운’ 대로 돌아갈 때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욕하고, 비관하고, 다치고. 하지만 그게 막강했다면, 세상은 이미 망해버렸을 것이다. 모두가 넘어진 채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테니까.

삶을 나아가게 하는 힘은 따로 있는 듯하다. 이번엔 아쉽더라도 다음 기회를 준비하고, 새살이 돋아 재생되는 일. 쉽지 않지만, 이런 일들이야말로 진정 힘이 있어 사람을 다시 살게 했을 것이다. 삶에 더욱 필요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쪽 같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드물다. 수고롭기 때문이다. 넘어진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일으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부지런한 것이다. 반드시 ‘그다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희망은 절망보다 더 풍성한 세계다.

정여울(45)의 에세이를 읽는다. 문학, 심리학, 예술, 여행을 통해 20년 가까이 희망과 회복을 이야기하는 작가. 흔한 단어가 돼버린 희망이 실은 얼마나 간신히 가질 수 있는 보물인지 깨달을수록, 그러니까 갈수록 그의 글은 소중하게 읽힌다.

“매일 쓰는 사람” 정여울의 작업실을 2022년 3월4일 오후 찾아갔다. 작가에겐 인터뷰도 가욋일이니 저녁 6시에 꼭 ‘퇴근’하게 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대화는 7시간 동안 이어졌다. 

여행의 향기를 길게 늘이는 방법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책장부터 보였다. 방·거실·주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야를 넘어서지 않는 크기의 공간이 아늑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글) 써요.” 여행 에세이스트로 이름난 작가라서 그런가? 글을 쓰기 위해 가장 많은 시간 머물렀을 책상부터 찾으려 한 생각이 기분 좋게 빗나갔다.

-작업실이 생긴 것은 4년쯤 됐지요?

“작업실을 구하기 전에는 길 위에서 많이 쓰고, 카페에서도 자주 썼어요. 이제 돌아다니면서 쓰기엔 몸이 힘들어서, (웃음) 글을 써서 월세를 낼 수 있을 정도가 됐을 때 작업공간을 마련했어요. 여기는 두 번째 작업실이에요.”

-그런데 작업실에서 또 돌아다니면서 쓰는 거네요. 재미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와 작업실의 관계도 그래요. 작업공간 안에서 조금씩 각도를 바꾸면서, 공간을 옮겨 다니면서, 모델의 다양한 면을 관찰했다고 해요.”

-공간이 인식의 확장에도 영향을 주는 건가요.

“그림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썼다가, 저기서도 썼다가. 공간을 막 돌아다니면서 쓰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든요.”

그의 시선이 컴퓨터 책상이 있는 방,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거실, 주방 식탁, 책장 앞 1인용 간이책상에 한 번씩 닿았다. 구석구석 어디서든 쓰다보니 글쓰기를 위한 한곳을 특정하기 어렵게 된 공간.

-여행에 관한 글을 많이 썼어요. 여행으로 탄생한 책이 여섯 권이에요.

“여행을 계속 하는 이유는, 다녀온 다음에 새로운 여행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에요. 여행지에서 보았지만 느끼지는 못했던 것들이 있거든요. 돌아와서 다시 문헌 조사를 했을 때,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그 장소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같은 여행을 계속 할 수 있는 거예요. 여행의 향기를 길게 늘이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갔던 곳에 또 가는 여행을 더 좋아해요.”

이 대답을 듣는 동안,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행복은 새로운 것을 가지는 게 아니라 가졌던 걸 또 가지는 일에 있다는 한 소설가의 문장도 떠올랐다. 16년간 무려 사십 권의 책을 쓴 창작력. 글을 쓰고 또 쓰는 동안 체화했을 행복의 길이 어쩌면 그의 여행 스타일이 된 것일지 모른다.

문학평론으로부터 ‘나’를 찾아서

-작가로 살면서 언제 행복을 느끼세요?

“초등학생, 중학생이 ‘저도 작가님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할 때 행복해요. 그런데 ‘작가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끝없이 마감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불안하기도 하고. 후배나 아이들에게 작가가 되라고 권할 수 있을까…. 물론 요즘은 작가, 하면 웹소설·웹툰 작가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긴 해요.”(같이 웃음)

-불안은 어떤 종류의 불안인가요?

“문해력이 점점 떨어지는 사회를 생각하면, 암울하지요.”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인데요.

“문해력은 결국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표현하려는 사람은 많은데 들으려는, 읽으려는 사람은 적어요. 요즘은 문해력도 상품이 돼버렸어요. 인스타그램 유명인을 작가로 만드는 분위기가 생겼어요. 상업화되는 문해력, 떨어지는 문해력, 이런 환경에서 글로 설득한다는 건 점점 어려운 일이지요. 책이 얼마나 팔릴지만 생각하는 문화를 생각하면 걱정스러워요.”

우려를 말하면서도 그의 목소리와 눈빛엔 처짐이 없었다. 그다음을 준비한다고 했다. “세대의 문해력을 높이는 게 지금 작가들에게 또 하나의 과제예요. 저도 문해력에 관한 기획을 구상하고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에세이의 잡스러움이 그 일에 적격이라고 생각해요. 소재가 무엇이든 특별한 문학적 장치 없이도 곧바로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바로 에세이의 잡스러움, 하이브리드적 에너지이거든요.”

정여울은 2004년 문학평론가로 등단했지만 지금은 에세이를 쓴다. 객관성을 추구하는 논문과 평론에서는 문장에 ‘나’를 쓸 수 없었다. “논리적인 글을 쓸 때는 갑옷을 입고 걸어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는 ‘나’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

2008년 펴낸 첫 문학평론집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제목에서부터 ‘나’가 있다. 이 책을 편집한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가 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당시 평론집엔 ‘나’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되고, 심지어 편집할 때 컬러(색채)도 쓰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정여울 선생님께서 그냥 다 하자고 해주셨어요.” 글로 세상에 나올 때부터 그는 진부한 관습을 떠나 자기만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사진=류우종 기자
사진=류우종 기자

투라우마에 두 번 쓰러지지 않는 나

작품 목록을 보면 두 개의 연도가 눈에 띈다. 2013년과 2017년. 2013년은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받은 <마음의 서재>와 에세이 부문 스테디셀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출간된 해로, 평론과 에세이가 배합된 글쓰기가 에세이로 본격 전환한 기점이다. 2017년은 문학과 심리학을 아우르는 글쓰기라는 고유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드러난 해다. ‘심리치유 에세이 3부작’이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로 시작해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상처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로 이어졌다.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10년 넘게 심리학을 공부했어요. 왜 심리학인가요?

“일단 제 마음이 너무 자주 아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심리학은 내가 내 마음으로 내시경을 넣는 것과 비슷해요. 요즘 엠비티아이(MBTI) 이야기 많이 하는데, 심리는 테스트가 아니에요. 자기 인식입니다. 저는 제 엠비티아이 유형을 모르지만 불안하지 않아요. 부족하고 결핍투성이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좋으니까요. 사주나 타로를 안 봐도 괜찮아요. 사주 봐서 작가 팔자 아니라면 어쩔 거예요? 그래도 글 쓸 거잖아요. 심리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잘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는 공부예요.”

그는 개인적인 고통을 글로 솔직하게 드러낸다. 따돌림을 당한 경험,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시달리던 좌절감, 그 밖에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어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일지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도 많다. 예컨대 트라우마로 어떤 장소에 아예 가지 못한다거나 하는.

자기 고통과 대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여울은 트라우마와 용감하게 만나고 마침내 트라우마와 화해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무엇이든 언어로 바꾸어놓았을 때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고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는다”(버지니아 울프)고 믿으며.

“트라우마를 글로 쓰는 것은 자기와의 사투다. 상처와 대면하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고통의 순간, 멈추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나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탄생이 시작된다. 우리는 비로소 발견한다. 트라우마에 두 번 쓰러지지 않는 나를, 그 어떤 트라우마도 결코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는 강인하고 지혜로운 또 하나의 나를.”(<상처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

정여울 제공
정여울 제공

“창조적인 사람은 나쁜 재료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요”

심리치유 에세이 3부작을 읽으면서, 고통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아픔과 좌절이 증거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키고 싶은 소중한 무엇이 있었다는 증거. 그 가치가 훼손됐기 때문에, 또는 그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껴안고 비를 맞느라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니까 쓰라린 감정에만 빠지기보다, 지키고 싶었던 가치에 더욱 집중한다면 고통의 서사는 달라질 수 있다. 불행 가운데 응시하는 대상이 달라진다면 삶이라는 각자의 문학, 자기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가능성과 만난다. 우리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통에서 끝나지 않게 된다. ‘다음 편’이 있다. 나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가, 나는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는 이야기는 분명 희망적이다.

-작가님에겐 고통을 무릅쓰고 지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가요?

“말씀하신 그 소중함의 핵심은,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아름다운 신화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희미한 가능성이 아니라 심장처럼 다 있어요. 도토리가 그 안에 나무를 품고 있는 것처럼요. 작지만 그 안에 저마다 거대한 떡갈나무, 참나무라는 신화가 들어 있어요. 제 안에 있는 신화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라크네예요. 페미니스트였지요. 여성을 강간하는 신을 비판했다가 평생 거미줄이나 치고 사는 벌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라크네는 거미줄로 태피스트리를 짜서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다른 벌레를 잡아먹는 거미줄이 아니었어요. 이것이 창조예요. 창조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나쁜 재료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요. 이 세상에는 나쁜 재료가 더 많을 수도 있어요. 말이 안 되는 조합으로 세상에 필요한, 소중한 것을 만들어내는 게 창조이지요.”

-아라크네의 거미줄은 레이스 같네요.

“네, 맞아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나아가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붕대가 되었어요. 저도 이야기의 실로 사람들의 상처를 동여매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것이 저의 신화이고 소중한 가치예요.”

-우리에게 신화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마다의 고유한 신화를 압살하는 게 현대의 신화라고 생각해요. 신화라고는 성공 신화뿐이지요. 성공은 신화가 아닌데. 성공을 만나면 내면의 이야기를 잃어버리기 쉬워요. 인류는 왜 신화를, 이야기를 만들었을까요? 살아남기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모든 신화 속에는 통과의례가 있어요. 통과의례란 영웅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지요.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하면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는 거예요. 통과의례를 마친 사람은 사회가 받아들여줘야 하는데, 지금은 통과의례 자체가 사라져버렸어요.”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는다면 성공이 다 무슨 소용일까요….

“통과의례를 잃어버린 현대인이 왜 삶에서 방향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통찰을 제공하는 책이 <신화의 힘>이에요. 신화학의 거장 조지프 캠벨과 인터뷰 전문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인데요. 글쓰기에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책이고, 여전히 자주 펼쳐봐요. 신화는 말해요. 힘이 있어야만 영웅이 아니라고.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신화를, 자기만의 이야기를 꼭 찾으셨으면 해요.”

눈비가 들이치는 툇마루의 에세이

-글쓰기의 기술적인 부분도 궁금해요. 분량부터 빠르게 채운 뒤 퇴고를 오래 하는 편이세요? 반대로, 문장을 세세하게 고치면서 써나가는 편인가요?

“청탁받은 원고인 경우, 힘겹게 분량을 채우기보다는 초고를 거칠게 많이 써둡니다. 정원사가 잔가지를 쳐내듯 세심하게 줄이는 쪽으로 작업하면 훨씬 결과가 좋았어요.”

-글의 얼개를 미리 짜두고 쓰기 시작하나요? 아니면, 글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채로 시작하나요?

“둘 다인데요. 얼개를 아무리 짜둬도 중간에 허물어집니다. (웃음) 글을 쓰면서 취재가 계속 확장되는 경우도 많고, 제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해요. 자유롭게, 때로는 얼토당토않게 미끄러지는 글쓰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메모나 글쓰기 자료도 그래요. 질서정연한 분류보다는, 잭슨 폴록이 춤추듯 물감을 흩뿌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자유롭게 분야와 작가와 키워드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메모해요. 재즈 연주자들이 악보를 벗어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즉흥연주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요.”

-재즈야말로 삶과 닮았어요. 예측이 안 되지요. 또 클래식과 달리 ‘미스터치’ 틀린 음이 없는 셈이잖아요. 더 다양한 소리가 인정되고, 음악이 돼요. 그런 점에서 에세이와 어울려요.

“저는 에세이의 끝까지 걸어가보고 싶어요. 에세이는 분명 문학인데 ‘비문학’ 취급을 받으며 문학의 대청마루에 오르지 못하고 문학의 툇마루쯤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거든요. 하지만 저는 에세이가 그 어떤 문학 장르보다 좋아요. 번듯한 대청마루보다는 눈비가 들이치는 툇마루가 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제 성정이지요. 툇마루는 내부이면서도 외부인 장소이니까요. 내부와 외부의 교집합 어디엔가 미묘하게 걸쳐 있는 툇마루의 편안함, 격식 없음, 양쪽 세계를 모두 다 끌어안을 수 있는 너른 품을 닮고 싶어요.”

에필로그

세상에서 가장 큰 ‘현대판 문방사우’를 본 듯합니다. 피아노는 크기만으로 압도적인 글쓰기 도구였어요. 정여울 작가의 작업실에는 피아노를 위한 방이 있었습니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펜도 필요하지만 피아노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글쓰기의 고통이 누를 때, 언어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 피아노를 쳐요.” 그러니까 언어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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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우종 기자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쳤고, 꿈도 피아니스트였다고 해요. “행복한 기억이 많아요. 합창대회나 수학여행 때도 아이들 노래에 피아노 반주 해주는 것이 좋았어요. 피아노가 저의 엔터테이너, 딴따라 기질을 일깨워주었지요.”

이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2악장을 들었습니다. 피아노를 조율할 때 연주하는 곡이라고 해요. 왜 베토벤 음악으로 음을 조율하는지 물었어요.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이야기했습니다. “달빛을 소리로, 자연을 음악으로 갖다 놓는 힘”에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을 배운다고요. “언어가 없는 곳에서도 치유와 배움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피아노를 통해 새긴다는 말, 매일 글을 쓰면서도 언어에 갇히는 걸 경계하는 작가의 말이 믿음직하게 들렸습니다.

그와 만난 뒤, 베토벤의 글도 조금 찾아 읽다가 한 편지를 발견했어요. 정여울 작가에게, 글을 읽고 쓰(려)는 바로 당신에게 꼭 보내는 것만 같아요. 전해봅니다.

“너만의 길을 따라가면 된단다. 그저 예술을 행함에 그치지 말고 내면으로 파고들기를 바란다. 화려함으로 내면의 빈곤함을 감추는 이들 말고, 너를 보러, 너의 작품을 보러 가고 싶구나.”(<음악의 언어>(송은혜)에서 재인용)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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