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서울 동국대 박물관 연구실에서 역저 <한국의 범종>을 들고 이야기하는 최응천 교수. 그가 가장 아끼는 11세기 고려범종이라는 청녕 4년명 종의 이미지와 설명을 담은 부분을 펴 보이고 있다. 노형석 기자
“전라북도 부안의 아름다운 절 내소사에 청림사란 옛 절 이름을 새긴 13세기 고려 범종이 있어요. 사람들이 내소사 종이라고 부르는 명작이죠. 문양과 모양새 모두 빼어난 이 명품 종을 만든 800여년 전 고려시대 천재 장인을 지난 30여년간 계속 만나왔지요. 그 만남이 나를 평생토록 범종 연구에 매달리게 만들었답니다.”
맑고 깊은 소리로 유명한 이 땅의 전통 범종에 얽힌 1000년 역사와 주요 명작을 집대성한 <한국의 범종>을 펴낸 동국대 최응천(63) 미술사학과 교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이름이 궁금하시죠? 한중서란 인물입니다. 원래 궁궐 수호군의 졸병이었어요. 불교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마침내 큰 종을 만드는 거장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제 한국 전통 범종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된 최 교수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청년 시절 절에서 집회 때 치는 도구인 반자를 연구했다. 당시 유난히 뛰어난 기법의 반자 명품을 만들고 명문까지 새긴 장인 한중서를 명문을 통해 접하게 됐고, 그가 문양이나 주조 기술 측면에서 고려 범종 최고의 명품인 청림사명 내소사 종을 만든 주역임을 알게 됐다.
‘천년을 이어온 깨우침의 소리’란 부제가 붙은 신간의 표지로 ‘청림사명 범종’의 이미지를 넣은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최고의 고려 종 명품을 만들며 자신의 학자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한중서와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30여년간 금속공예사가로 활약해온 그는 남북한과 일본, 미국, 프랑스 등 국내외에 흩어진 범종 현황을 꾸준히 조사해왔고, 이런 연구 성과를 한데 묶어 이번에 역작을 펴냈다.
통일신라부터 근대까지 이 땅 전통 종의 1000년 역사를 처음 온전하게 아울러 서술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범종>은 한반도, 일본, 미국, 프랑스 등 국내외 흩어진 한국 전통 범종 작품 363점을 망라했다. 풍부한 이미지는 물론 세부 문양, 재질별 내역과 명문, 전래 및 이산 경위까지 다루었다. 특히 일본 후쿠이현 쓰루가 조구신사에 있는 연지사 종 등 일본에 흩어진 수십점의 통일신라, 고려, 조선 종의 내력을 그가 직접 찍은 희귀 사진과 함께 다룬 것은 독보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최초의 범종사 백과사전이자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종합개설서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학술성과 대중성이 어우러진 미술사 노작이라 할 수 있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일반 독자가 편히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친절하게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타종을 멈추었거나 소실된 범종 등을 포함한 국내 범종 41점의 종소리를 정보무늬(QR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게 한 것도 독창적인 장점이다.
“사실 제야의 종소리는 누구나 알잖아요. 그만큼 종이란 게 굉장히 친근하지만, 우리 옆에 있는 듯하면서도 사실 전통 범종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잘 몰라요. 종소리와 몸체의 양식과 표면의 문양 등에 얽힌 종 자체의 아름다움과 내력을 동시에 바라보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종각에서 과거에 연말마다 타종했던 보신각 종이 깨져서 새로운 종이 만들어졌고 원래 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앞마당 보호각에 있는 한국 범종사 최고의 명작인 8세기께의 성덕대왕신종도 사람들은 그 소리와 치는 풍경만 기억한다. 이 때문에 국립박물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신종을 다시 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최 교수는 이에 대해 전통 종을 직접 타종하자는 주장은 절대로 꺼내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저는 수년 전 문화재위원 할 때도 오래된 전통 종은 절대 치면 안 된다고 주장했어요. 종은 영원한 생명력이 있는 게 아니에요. 언젠가 깨어지게 되어 있어요. 상원사 종, 보신각 종, 낙산사 종, 다 20세기 들어와 불타고 깨어졌어요. 성덕대왕신종은 지금까지 칠 수 있는, 생명력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고대 종입니다. 그걸 우리 대에서 꼭 생명력을 끊어야 합니까.”
그는 책에 큐아르코드로 일부 넣은 전통 범종들의 소리를 모두 집대성한 아카이브를 만들고 일본에 있는 전통 범종의 모든 연구 정보를 총체적으로 모으는 것이 학자로서의 숙원이라며 말을 맺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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