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갤러리 단정 이영란 대표
‘코로나 광풍’ 3년째인 지난 2월 입춘일,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겨 폐업이 줄을 잇고 있는 북촌 뒷골목에 갤러리 하나가 새로 문을 열었다. 정독도서관 옆길 구석진 자리에 15평 남짓 작은 공간이지만 ‘남다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화가이거나 상당한 내공의 컬렉터일 것이라는 짐작과 달리, 그 주인공은 작가·기자·편집자로 30년 넘게 활동해온 ‘글쟁이’였다.
“정확한 주소는 화동 102번지, 조선 왕실의 꽃과 과일을 관리하던 관청인 ‘정원서’ 동네죠. 그래서 ‘예술과 영감이 피어나는 샘터’라는 의미를 담아 갤러리 이름을 ‘단정’(丹井)으로 지었어요. 특히 지역에서 활동중인 작가들을 발굴해 알리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갤러리 단정의 이영란(54) 대표에게 5일 도전의 계기와 구상을 들어봤다.
기자·동화 작가·편집회사 운영 ‘글쟁이’
7년간 ‘케이티엑스 매거진’ 편집장 활약
지난해 9월 운영사 ‘관광한파’ 부도로 해직 최근 화동 뒷골목서 15평 미술관 시작
부평·포천·광주·원주…‘숨은 작가’ 발굴
“전국적 인맥·80여개 나라 취재 경험 살려”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해 9월 ‘자의반 타의반’ 해직이었어요. 2015년부터 7년간 편집장이자 마케팅까지 담당했던 월간 <케이티엑스(KTX) 매거진>의 운영사가 코로나 직격탄으로 부도를 맞는 바람에 발행이 중단됐거든요. 한국철도의 위탁을 받아 여행과 예술 위주의 문화정보를 소개해왔는데, 관광 한파로 광고가 줄면서 막대한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한 때문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새 위탁운영사가 나서 기존 편집인력은 대부분 재고용이 됐지만, 가장 ‘몸값’이 높았던 그는 승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워낙 사람과 여행을 좋아해서 지난 7년간 국내는 물론 지구촌 80여개 나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신나게 일했어요. 그만큼 잡지에 애착도 컸지만 얻은 게 더 많다는 생각에 억울하지는 않았어요. 무엇보다 전국 방방곡곡 취재 등으로 맺어온 작가들 인맥과 지자체와 협력 마케팅 경험을 살려 갤러리를 운영해도 좋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니까요.”
실제로 개관전을 비롯해 9월까지 예정된 단정의 전시 기획을 보면, 서울에서 활동하거나 이미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들보다는 지역의 소장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개관기념 첫 전시인 부평 우인영 작가의 개인전 <꽃 과일과 사이좋게>(2월4일~27일)를 비롯해, 두번째 광주 작가 서영실의 <그리운 시간과 애틋하게>(3월12일~4월10일), 세번째 포천 가삼도예 박소연 작가와 이다현 파티시에의 테이블웨어전 <꽃이랑 감미롭게>(4월16일~24일)에 이은 박 작가의 도자공예 개인전(4월17일~5월15일), 네번째 안양 작가 이민의 제주 풍경 판타블로(회화와 판화를 결합한 그림) 작품전(5월18일~6월12일), 다섯번째 원주 조수정 작가의 <꽃과 집이 있는 회화>(가제, 6월25일~7월15일), 여섯번째 인도네시아 작가 루카스 실라버스 초대전(예정·8월31일~9월8일) 등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이기도 하고, 갤러리가 자리한 북촌의 정서와도 잘 맞는 작품들이죠. 이민 작가는 최근에 광주의 복지시설에 1억을 기부해 예술인으로는 보기 드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해요. 인도네시아 작가는 직접 모르지만, 예전에 취재한 인연으로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과 공동기획을 진행중이죠.”
그가 이처럼 숨은 작가들에게 시선을 두게 된 배경에는 남다른 삶의 이력도 있었다. 1968년 경기도 여주에서 막내로 태어난 그는 6살 때 어머니를, 중2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고1 때 언니가 시집을 가고, 이듬해 오빠마저 군에 입대한 이후로 줄곧 혼자 자취를 했어요. 다행히 인복이 많아, 성당과 친구의 부모님들께서 등록금부터 학습서, 도시락, 김장김치 등등 아낌없이 도와주신 덕분에 고생스러운 줄 몰랐어요. 늘 그 고마움을 갚고자 남들보다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죠.”
그는 일찍이 초등학교 때부터 글솜씨와 이야기꾼의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취직을 빨리 해야할 처지였기에 88올림픽 때 관광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보사 기자로 들어가 졸업하자마자 미디어회사 입사해 잡지사 기자가 됐고, 2002년부터 12년간은 편집디자인전문업체 ‘시선’을 직접 운영하며 다양한 매체를 만들어냈죠.”
드라마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던 2014년 그는 마흔살 이른 나이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팔순 기념으로, 6살 때부터 40살 때까지 딸의 시선으로 그림동화책 <엄마 파는 가게 있나요?>를 펴내 작가 명함도 얻었다. ‘2014 런던도서전’ 마켓포커스에도 참가한 이 책은 싱가포르에서 출간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그는 오십 넘어 뒤늦게 성균관대 미디어문화융합대학원에 진학해 석사에 이어 건국대 일반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계획한 적은 없지만, 뒤돌아보니 관광학과부터 편집대행사, ‘케이티엑스 매거진’, 그리고 만학 도전까지 선택했던 길이 모두 문화공간 운영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다행스러워요.”
언젠가 함께 작업했던 디자이너가 붙여준 ‘창조에서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사람’이란 수식어가 마음에 든다는 그는 “마음이 어두울 때 빛과 힘이 되어주는 그림들로 관람객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02)6104-0058.
ccandori@hani.co.kr, 사진 김태유 작가 제공

갤러리 단정의 이영란 대표가 개관 기념 두번째 기획전인 서영실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광주에서 활동중인 서 작가의 9번째 개인전인 <그리운 시간과 애틋하게>은 오는 4월10일까지 열린다. 사진 김태유 작가 제공
7년간 ‘케이티엑스 매거진’ 편집장 활약
지난해 9월 운영사 ‘관광한파’ 부도로 해직 최근 화동 뒷골목서 15평 미술관 시작
부평·포천·광주·원주…‘숨은 작가’ 발굴
“전국적 인맥·80여개 나라 취재 경험 살려”

갤러리 단정(丹井)은 서울 화동의 정독도서관 왼쪽 골목 구석에 자리했다. 조선 왕실의 꽃과 과일 등을 관리한 정원서가 있던 화동의 내력에 맞춰 개관 기념 기획전의 주제를 꽃으로 삼았다. 갤러리 단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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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부모를 여읜 이영란 대표는 2014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그림동화책 <엄마 파는 가게 있나요?>을 펴내기도 했다. 시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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