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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앞선 지성들 깨달음 알려온 ‘용감한 전위’ 그 기록들 잘 갈무리하리다”

등록 2022-03-24 21:07수정 2022-03-25 02:30

[가신이의 발자취] 고 성완경 평론가를 기리며
2018년 9월6일 광주비엔날레 개막식 현장에서 고 성완경(오른쪽) 평론가와 필자 이기웅 열화당 발행인. 열화당 제공
2018년 9월6일 광주비엔날레 개막식 현장에서 고 성완경(오른쪽) 평론가와 필자 이기웅 열화당 발행인. 열화당 제공

평생 책 만드는 일을 해 온 나였기에, 필자들이 모두 나의 벗이요 이웃들이다. 저자들 중에서도 지난 18일 떠난 고 성완경은 내게는 무언가 특별하고, 그래서 늘 ‘간절한’ 분이었다. 조심해서 아껴 모신다고 할까 그런 필자였다.

그는 말이 많을 만한 평론가였지만 말수가 매우 적었다. 평생을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배우고 많이 쓰고, 또 많이 모았으니 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자신의 말은 매우 아껴서, 분명하고 적확하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표현하곤 했다.

그의 서재는 ‘만 권의 서책’으로 늘 그득했다. 뭉치로 모은 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땀땀이 모인 것이라니까, 그 서책의 모인 의미가 남다르다 해야겠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미학자인 최민이 주동이 되어 성완경과 나 셋이 모여 <시각과 언어>라는 부정기 간행물을 기획할 때였다. 첫 권에서 ‘산업사회와 이미지의 현실’이라는 주제로, 우리 미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담대한 기획을 해내면서, 열화당 편집실에서 머리글을 밤을 새워 마무리를 짓던 성완경의 맹렬하고 진지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의 열정은 민중미술운동의 깃발을 든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이라는 동인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매체이기를 자임하려는 의도에서 우러났을 터이다.

‘현발’의 동인지 <현실과 발언>의 머리글 일부를 잠시 보자. “돌아보면 우리의 미술문화는 아직도 순수주의의 이름으로 현실도피적이고 형식유희적인 실험이며 복고적 전통주의에 젖어 있으며, 삶의 진실과 그 역동성을 체계적으로 소외시키는 피폐한 상업주의 내지 고급문화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외래문화의 오염과 맹목적 사대주의의 청산도 아직 요원한 채로 있다.”

당시로써는 깜짝 놀랄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한마디로 ‘앞선 지성들’의 깨달음을 갇힌 우리들에게 알리려는 용감한 아방가르드(전위)들이 아니겠는가. 성완경은 그들의 맨 앞을 선도하고 있었다. <시각과 언어>(열화당, 1982) 첫 권의 반응은 놀라웠다. 군부독재 정권과 그에 영합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억압 속에서도 ‘지성’과 ‘양식’의 싹들은 자라고 있어, 알게 모르게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찾았다.

성완경의 머리글부터 김우창의 ‘산업시대의 미학과 인간’, 존 버거의 ‘광고 이미지와 소비문화’, 수전 손타그의 ‘플라톤의 동굴에서’, 성완경의 ‘사진과 현실’, 한스 페터 투른의 ‘미술중개기관의 사회학’, 반 덴 하아그의 ‘미술관과 대중’ 등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내용이 혁신적인 편집 체제와 더불어 독자들의 감흥을 드높였던 것이다.

특히 책의 말미에 실린 동인들의 좌담 ‘미술의 순수성과 현실의식’에 이르면, 미술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히 대변하고 있어 크게 주목받았다. 참가자들은 문화예술계에 중진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라서 지금까지도 흥미로운 자료로 찾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대학의 교수와 작가들인 이봉렬, 오경환, 한운성, 오윤, 김정헌, 임옥상, 심정수, 그리고 <계간미술> 기자였던 이태호 등이다.

그뒤 지난 세기 말인 1999년 나는 성완경의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라는, 그의 미술비평 인생의 중간을 정리하는 책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는 책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세기의 노을녘에 슬그머니 이 책을 내려놓는다. 마치 내 물건이 아닌 것처럼 슬쩍 떨구어 놓고는 가급적 희미하게, 무사하게 시야에서 사라져 주길 바라듯이 그렇게 떠내려 보낸다. 잘 가거라. 잘 떠내려가거라. 너는 이제 내가 아냐. 안녕. 아비를 찾지 말거라. ‘산소의 양이 부족했던’ 힘들었던 시절, 투쟁과 싸움터의 한가운데서 너를 가졌단다. 생후의 네 모습에 대한 기약도 없이 아주 먼 옛날 그 시절에 만들어진 너의, 마치 미숙아처럼, 아직도 축축한 피부 속 한 자루 내장, 팔딱거리는 허파 잎, 잘 가거라. 잘 마르고 영글거라. 네 길을 가거라.”

이 글을 다시 꺼내 읽으며, 나는 기록을 향한 그의 가없이 아픈 애착, 그에 대한 책무들, 그러나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운명에의 고뇌가 짙게 느껴진다. 예술의 진실을 찾아 정의롭게 글 쓰고 황야에서 외치던 기록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 이 책에 실어 송구영신하겠다는, 한가락 판소리 가락 같다.

어쩌랴,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성완경의 이승 행보는 멈췄고, 이제 그는 역사의 시간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가 역사 속에서 단정하게 자리잡아 존재하도록 가지런히 염(殮)해 드려야겠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기록들, 흔적들, 조각난 도큐먼트들을 정성껏 모으는, 그런 일을 맡을 후예들에게 임무가 잘 부여되기를 빈다.

이기웅/열화당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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