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대선주자 지지율 1위 후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국회의사당 테러 사건의 진짜 배후가 행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른 척 넘기면 사건은 외부 소행으로 정리되고,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할 수 있다. 사실을 밝히면 진실은 드러나지만, 여차여차 대선에는 출마할 수 없다. 다 잡은 권력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그걸 밝힐 수 있을까?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2019년)의 박무진(지진희) 대통령 권한대행은 차기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테러범과 공모해 국회의사당 테러 사건에 일조한 배후가 행정부에 있다”고 국민한테 알린다. 그는 “지지율 1위 후보는 지지율에 영향 미치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다”는 비서진의 만류에도 개인의 권력보다 투명한 대한민국을 위해 진실을 택했다.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끝까지 버라이어티하다. 직전 대선까지 후보들은 주로 젊은층에 “투표하자”며 호소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까지도 뭐가 펑펑 터진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후보들을 둘러싼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투표일 사흘을 남겨두고 후보의 가담을 주장하는 녹음파일까지 나오기도 했다. 주장만 있을 뿐 실체는 없고, 서로 비난만 할 뿐 스스로는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대체 누굴 뽑아야 할까” 마음이 복잡하다면 드라마 속 대통령을 떠올려보자. 박무진 같은 상황에서 현실의 누가 어떤 선택을 할지? 그나마 누가 박무진에 좀 더 가까울 수 있을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또 하나의 과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로 우린 대한민국을 천국으로 그 어떤 고통과 불평등이 없는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거와 민주주의의 최소 기준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치를 수 있도록 권한대행으로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대한민국은 저와 여러분의 자부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박무진 대사 중)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만 보지 말고 스스로 잘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2월 종영한
드라마 <공작도시>에서는 이미지 정치의 실체가 잘 드러나 있다. <공작도시>는 남편 정준혁(김강우)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야심가 아내 윤재희(수애)와 어머니 서한숙(김미숙)이 서로 견제하고 공조하며 나아가는 이야기다.
잘 나가는 앵커에서 정치인이 된 정준혁은 “특권 없는 세상,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하지만, 그 이면엔 자신들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특권의식이 누구보다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장준혁의 좋은 사람인 척, 정직한 사람인 척에 모두 속는다. 대한민국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성진그룹의 실세 서한숙도 투표권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사람마다 교양과 지식수준이 다른 데도 모두가 다 똑같이 투표권을 갖고 있으니. 다른 건 몰라도 국가 최고 권력자 자리만큼은 책임 있는 사람들끼리 의논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선 후보들의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전략이다. 정준혁은 자유혁신당 입당 전 노년층 지지율 확보가 시급해 장인어른이 치매로 입원 중인 요양원에서 급하게 행사를 진행한다. 함께 일하던 직원의 장례식장에 아이를 꼭 데려가야 하느냐는 윤재희 말에 유진석(명계남) 비대위원장은 “젊은 부부에게 어린아이는 화룡점정이다”라고 표현한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내릴 때의 순서와 표정도 정해준다. “먼저 사모님 챙기시고 아드님 손잡으시고 세분이 나란히 걸어 들어가시면 됩니다. 표정에 각별히 신경 쓰시고요.”(유진석) 윤재희가 몰래 아이를 입양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난을 받자, 정준혁은 이 역시 “아내 마음 헤아리지 못한 나는 떳떳하지 못한 남편이다. 아내에 대한 비난을 멈춰달라”며 선거에 이용해 점수를 얻는다.
저들의 연기에 속아 정준혁 같은 사람한테 권력을 쥐어주는 순간 바로 ‘대통령 비리’로 이어진다.
드라마 <배가본드>(2019년)에서 대통령은 방산 비리의 중심에 서 있다. 민항 여객기 추락 사고인 줄 알았는데 음모가 있었다. 한국 대통령이 무기 거래의 대가로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일부러 여객기를 추락시킨 것이다. 국정원장 등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이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공약이 말 뿐인지 실현 가능한지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드라마에서는 2010년 이전에는 인간적인 대통령, 이후에는 책임감 강한 대통령이 많았다. <대물>(2010)에선 첫 여성대통령을 내세워 국가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을 강조했고, <프레지던트>(2010)에서는 “대통령은 투표하는 국민이 만든다”며 투표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리는 대통령은 주로 악역이 많았고, 최근 수년 사이에는 시대 변화를 담은 독특한 설정으로 변모해갔다. 가상의 디스토피아가 배경인
드라마 <악마 판사>(2021년)에서 허중세(백현진)는 국가가 국민에게 신뢰를 잃었을 때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느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허중세는 감초 조연배우 출신으로 정치 유튜버로 활동하다가 사회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에 “강력한 법질서, 강력한 대한민국”을 외치며 인기를 얻고 사회적 책임 재단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다. 시대가 변하면서 국민은 사회관계망서비스 등 다양한 창구로 목소리를 낸다. 흐름을 잘 탔지만, 큰소리만 칠 뿐 정작 깊은 고민은 하지 않는다. 각자의 소신대로 살아가는 요즘 국민한테 저급한 대통령은 큰 존재감을 주지 못한다.
<60일 지정생존자> 비서진들의 마음은 3월9일 투표에 임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좋은 사람이라서 이기는 세상, 의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 이 나라를 맡기고 싶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