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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범죄로 사회 통찰…이토록 알차고 쓸모있는 예능이라니

등록 2022-02-26 18:25수정 2022-02-27 16:03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tvN ‘알쓸범잡2’
티브이엔 제공
티브이엔 제공

<알쓸범잡2>는 출연자들의 대화로 지식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4월 시작해 14회로 시즌1을 마치고, 올해 1월부터 시즌2가 시작되었다. 시즌1의 사회자 윤종신, 물리학자 김상욱은 유임되고, 변호사 서혜진, 범죄학자 권일용, 소설가 장강명이 합류하였다. 시즌 1에 비해 패널 구성이 효율적으로 보강된 느낌이다.

<알쓸범잡>은 <알쓸신잡>에서 파생된 제목이다. 그러나 ‘알쓸신잡’은 ‘알아두면 쓸데없는’의 줄임말이고, ‘알쓸범잡’은 ‘알아두면 쓸데 있는’의 줄임말이다. 쓸데없음과 있음을 가르는 제작진의 판단이 칼 같다. <알쓸신잡>은 지역 명승지와 맛집을 돌아다니며, 출연진들이 ‘잡학의 썰’을 푸는 프로그램이었다. 소위 지식인 출연진들이 전공분야를 넘나들며 교양을 자랑하고 풍류 객담을 주고받았다. 시즌3이 나올 만큼 인기도 높았지만, 유시민·황교익으로 대표되는 386 식자들의 술자리 환담 같은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회고하는 회차가 최고 시청률을 찍었고, 시즌2 제작발표회에서 나영석 피디가 “유시민 작가가 한 말 중에 틀린 것이 많아서, 나중에 편집에서 골라서 내보낸다”고 말했던 것이 아이러니한 잔상으로 교차한다. 요컨대 업데이트 안 된 386 지식인의 고답적이고 자아도취적인 방담에 가까웠는데, 이는 제작진의 ‘쓸데없는’ 이라는 작명으로 묘하게 변호되었다.

반면 <알쓸범잡>은 대단히 시의성이 높고 지금 우리 사회를 이해하고 바꾸는 데 쓸모 있는 지식을 전한다. 매회 어떤 지역에 가서 출연자들이 범죄와 관련 있는 장소를 찾아가 취재한 뒤 모여서 토론한다. 지역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범죄 사건들을 되짚지만, 개별 범죄에 함몰되기보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며 사회적 해결책은 무엇인지 고민한다. 나아가 범죄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프로그램은 범죄 사건을 선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출연자들이 간명한 말투로 사건을 기술하고, 당시 뉴스클립이나 이해를 돕는 간략한 그래픽이 삽입될 뿐이다. 극적인 스토리텔링을 활용하거나 과도한 리액션을 반복해서 보여주지도 않는다. 클로즈업이나 리드미컬한 편집을 쓰지도 않는다. 비슷한 형식의 <당혹사>나 <꼬꼬무>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또한 화자와 청자 사이에 균형이 잘 맞고 각자 역할이 겹치지 않아서 산만하거나 늘어지지 않는다. 예능성을 지향하지 않지만, 사건 자체와 이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논의들이 담백한 재미를 준다. 출연자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자기 영역을 뛰어넘는 교양의 수준을 보여주며, 성실한 자료조사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살찌운다. 특히 김상욱은 과학자로서 디지털 범죄나 환경 범죄 등을 설명하는 한편, 형제복지원 생존자의 수기 <살아남은 아이>나 소설 <도가니> <소년이 온다> 등 사건과 관련된 책을 찾아와 읽어주는 정성을 보인다. 서혜진은 유일한 여성 출연자이자 법률가로서 최근 문제가 되었던 (디지털) 성폭력, 스토킹 범죄, 가정폭력 등 젠더 범죄 사건들을 꼼꼼하게 짚으며 법의 허점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프로그램이 얼마나 알찬 지식들도 빼곡한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최근 회인 6회 ‘광주’ 편을 보자. 먼저 노인이 노인을 돌보다 살해한 간병 살인 사건으로 입을 뗀 출연자들은 전국에 요양보호사가 150만 명에 이르지만, 돌봄의 질이 매우 낮은 사회현실을 짚었다. 이어서 인화학교 아동성폭행 사건, 일명 ‘도가니’ 사건을 다루었다. 가해자가 6명에 피해자가 9명이나 되는 이 사건이 5년 넘게 묻혔던 이유로, 족벌 경영을 하는 기숙학교의 폐쇄성을 짚었다. 또한 솜방망이 처벌이 일어난 이유로 친고제와 준강간죄의 항거불능 규정을 꼽았다. 이어서 고종석 사건을 통해 전체 성폭력 사건의 30%이상이 아동 대상의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짚었다. 또한 작년에 일어난 광주 학동 재개발 철거 사건과 올해 일어난 광주 화정동 아파트 붕괴 사건을 짚었다. 50년 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을 같이 언급하면서, 재하도급을 통해 50억원의 공사비가 9억원으로 줄어들고 부실시공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고찰했다.

하지만 광주 편의 백미는 역시 광주민주화운동 때 벌어졌던 국가폭력에 대한 고찰이다. 김상욱은 10·26 사건과 12·12 사건을 훑으면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전국을 장악하기 위해 5월17일에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이에 맞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 시민들이 항쟁에 나섰음을 차분하게 풀어냈다. 흔히 ‘갑자기 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서,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다’는 식의 어리둥절한 희생자 담론에서 벗어나 불의한 군사 쿠데타에 맞서는 민주시민들의 항거임을 분명히 하였다. 발포 명령을 둘러싸고 현장 군인들의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논리의 허점도 짚었다. 발포 시작일까지 군인 사망자가 한명도 없었다는 점과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은 자위권 발동에 의한 발포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이런 설명과 함께 전일빌딩에 올라 245개의 총탄자국을 직접 보여주는 장면은 감정을 배제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예능프로그램 한 회차에 이렇게나 중요한 내용들이 담긴다는 게 믿어지는가. 다른 회차도 마찬가지다. 5회 창원 편에서 짚은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과 온산병 사건,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과 2차 가해도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4회에서 다룬 엔(n)번방 사건의 수사 과정과 3회에서 다룬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의 가해 할머니가 학대받는 여성 증후군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처음 공개된 내용이다.

지식과 교양이 무쓸모로 치부되는 탈진실과 반지성의 시대에, 지식과 교양이 여전히 쓸모 있음을 증명하며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는 예능프로그램이라니, 그저 리스펙트!

대중문화평론가 

바로잡습니다/ 6번째 문단 두번째 문장에서 '김상욱' 물리학자 이름을 '김성욱'으로 잘못 표기했습니다. 독자와 김상욱님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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