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빨간 후드티를 입고 해맑게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배우 이름도 작품도 기억나진 않는다. 분명한 건, 그 미소가 떠오를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 광고 속 인물인가, 블로그 속 사진인가. ‘아 어디서 봤더라….’
지난해 11월 온라인동영상서비스(오티티) 웨이브에서 방영한 정치풍자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서 그를 찾았다. 이정은(김성령)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대변인 신원희로 나온 배우 이채은. 이 작품에선 거의 웃진 않았지만, 똑 부러지는 목소리와 특유의 생동감은 그대로였다. 잊히지 않던 미소는 웹드라마 <오구실>의 한 장면이었다. “혼자 사는 30대 여성 얘기인데 현실적이어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자 캐릭터이죠.” <오구실>은 2015년 시작해 2017년 시즌3까지 방영했다.
이채은의 팬을 많이 만들어낸 웹드라마 <오구실>. 화면 가득 웃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갈무리
이채은은 지난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하고 매사에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여성 직장인들한테 멋진 언니, 닮고 싶은 존재로 떠올랐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연설문을 늘 다양한 버전으로 준비해놓고, 최연소 정부부처 대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편’조차 훅 치고 들어오는 선입견에 영리하게 대응했다. 그는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신원희에게서 그런 느낌을(통쾌함) 받을지 몰랐다. 오히려 일에서 너무 완벽해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들의 로망에 가까운 인물을 제가 연기했다는 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실제 전 엉뚱하고, 허당이지만요. 하하하.” 머릿속을 차지하던 그 미소다.
신원희 대변인이 사랑받은 데는 배우의 역할이 컸다. 그는 틀에 박힌 연기를 할까 봐 “대변인도 안 만나고, 관련 영화도 안 봤다”지만, “다른 작품에 견줘 5배 이상 힘들었다”는 말 속에 노력이 비친다. “평소 대사 톤보다 더 딴딴하고, 훨씬 빠른 속도로 말했어요. 연습 때 충분히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에 가면 감독님이 늘 ‘더 빨리’를 외치셨죠. 그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런데도 대사가 정확하게 들린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한 드라마 피디는 “발음과 톤 조절을 잘하며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정확하게 말한다. 내공이 상당하다. 연기를 참 잘하는 배우”라고 평했다.
그를 대중적으로 좀 더 알린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웨이브 제공
실력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게 아니다. 그는 ‘독립영화계 전도연’으로 불릴 만큼 연기 잘하는 배우로 유명했다. “안 돼요, 전도연 선배님한테 너무 죄송한데.” 2005년 <빨간 나비>를 시작으로 독립영화만 약 50편에 출연했고,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인정받았다. 2009년 ‘미쟝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은 그가 독립영화계에서는 더 오를 곳이 없다는 걸 상징한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 최연소 대변인이 된 신원희와 달리, 연기는 1등 한다고 주인공이 되는 건 아니다. 이채은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로 많은 사랑을 받기까지는 15년이 흘렀다. 2005년 영화 <공공의 적>을 시작으로 대중매체를 시작했다. 큰 성공을 거둔 드라마의 주인공 4인방 중 한명으로, 캐스팅 마지막에서 어긋나는 등 대중매체와 연이 잘 닿지 않았다. “유리천장 같다고 해야 할까요. 길은 보이는데 뚫을 방법이 없으니. 그 막막함과 답답함으로 지냈던 시간이 길었어요.”
20대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나니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내려놓게 되더라”고 한다. “연기를 할수록 어렵다는 걸 알아서일까요, 두려워지더라고요. 유명해지고 더 큰 배역을 맡을수록 이보다 더 힘든 고통을 겪을 텐데, 그걸 내가 감당하기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히려 부담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절 좋아해 주시는 분도 있고, 아예 모르시는 분도 있고. 지금 이 상태가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배우는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것, 그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어릴 때 엄마 손잡고 영화관에 간 이후부터 배우를 꿈꿨고, 그 꿈은 살면서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소극적이었는데, 연기라는 프레임을 씌어놓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 동경하는 마음이 생겼나 봐요.” 그의 작품을 보면, 이채은은 외적인 변화 없이 연기만으로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 활짝 웃거나 , 굳은 표정의 변화 정도 ? 발랄한 30대 싱글이 됐다가 , 완벽한 커리어우먼을 오직 대사 톤 , 표정 등으로 넘나든다 . 그게 가능할까 싶은데, 그는 가능했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그에게 오히려 주변에서 “ 더 잘돼야 한다 . 너의 연기력이 아깝다 ”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유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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