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의 케이(왼쪽)와 구경이. 제이티비시 제공
“앞으로도 열심히 멋지고 이상한 여자들 이야기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지난 10월26일 발표한 제4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문소리가 밝힌 소감이다. 문소리는 영화 <세자매>로 수상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의 말을 급하게 받아 적었다. 동시에 여러 얼굴이 스쳐갔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전에 없던, 묘한 아우라의 낯선 여자들.
최근 티브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다양한 콘텐츠 플랫폼에서 인기를 끄는 작품들엔 공통점이 있다. <제이티비시>(JTBC)의 <구경이>부터 <술꾼도시여자들>(티빙), <지옥>(넷플릭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웨이브) 등 말이다. 구성과 이야기 구조, 소재는 다르지만, 말 그대로 ‘멋지고 이상한 여자들’이 나온다.
드라마 <구경이>의 구경이 역을 맡은 이영애. 제이티비시 제공
<구경이>는 강박적으로 모든 일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전 강력계 형사 ‘구경이’(이영애)가 무자비한 연쇄살인마 케이(K)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구경이는 남편의 자살 이후 게임 중독에 빠져 폐인처럼 살지만 후배의 권유로 보험조사관을 맡으면서 예리한 감각으로 수사망을 좁혀나간다. 날씨에 상관없이 트레이닝복만 입고, 머리는 늘 푸시시하다. 집은 쓰레기 더미이고, 몸에선 자주 씻지 않아 냄새가 난다. 일찍이 여성 경찰이 등장하는 범죄 추적 드라마에선 보기 드문 캐릭터다. 주로 여성 경찰은 명랑한 신입으로 팀 분위기를 환하게 밝히거나, 남성 경찰의 도움을 받는 애물단지 같은 존재였다. 직업인으로서 능력이 부각되기보다는 남성 캐릭터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구경이>에서 케이 역을 맡은 김혜준. 제이티비시 제공
하지만 구경이는 달랐다. 그는 살인마 케이가 ‘송이경’(김혜준)이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감지해낸 인물이었고, 조사팀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예리한 통찰력으로 팀을 구한다. 구경이란 캐릭터에 빠진 이들의 시선을 붙잡은 인물이 드라마엔 또 있다. 케이 말이다. 그동안 드라마·영화 등에 등장한 많은 악녀가 시기와 질투, 애먼 욕망으로 어리석은 잘못을 저질렀다면, 케이는 무자비하지만 자기 나름의 기준과 판단으로 살인 목표를 정한다. 게다가 한번 타깃을 정하면 타살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게 하는 치밀한 전략가 면모까지 갖췄다.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해맑게 웃으며 의연하게 연기하는 모습은 뭐랄까, 은은하게 미쳐 있는 것만 같다. 주인공도 여성, 빌런도 여성이다. 또 다른 빌런 용국장(김해숙)도 여성, 구경이를 돕는 후배 나제희(곽선영)도 여성이다. 2 대 2 구도로, 이들은 합종연횡을 반복한다.
그런가 하면 <술꾼도시여자들>의 주인공 강지구(정은지), 한지연(한선화), 안소희(이선빈)는 친구 사이로, 일명 ‘말술’들이다. 술을 궤짝으로 마셔야 그나마 취기가 겨우 오른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행위를 자랑삼는 여성 캐릭터는 과거에 보기 드물었다. 낯설지만, 그래서 더 반갑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미덕은 ‘그저 마시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통상 드라마가 술이란 소재를 이야기 전개에 활용하는 방법은 주인공 여자를 차지하려는 남성들의 주량 대결의 도구 정도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술 마시는 행위는 여성 간의 애틋한 관계와 오랫동안 함께해온 역사를 조명하는 수단이다. 친한 친구와 마시는 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취하고 웃고 울고 다투다 또 화해하는 모든 감정의 총합이 술로 수렴된다.
<지옥>의 민혜진 역을 맡은 김현주. 넷플릭스 제공
<지옥>과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에서는 타인의 기준과 판단에 휩쓸리지 않는 여성 리더가 등장한다. <지옥>의 변호사 민혜진(김현주)이 사람들이 맹신하는 존재를 제대로 의심하도록 물꼬를 튼 인물이라면 ‘이상청’의 장관 이정은(김성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캐릭터다. 두 인물 모두 각자의 결핍과 불완전함을 고스란히 내비친다. 과거 완벽하게만 그려지던 여성 리더들과 다른 점이다. ‘완벽하지 않음’이 불러올 평가와 비난에 굴복하지 않는다. 결국엔 해결책을 찾기에 의미가 있다. 인간적이다.
<이상청>의 주인공 역을 맡은 김성령. 웨이브 제공
여성이 단독 주연만 맡아도 환호하던 시절이 있었다. 극 중 여성 조연의 비중이 커지면 그것도 환호했다. 영화 <독전>의 보령(진서연) 같은 여성 악역의 탄생도 반겼다.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을까’ 싶었던 여성 캐릭터의 확장을 이제 의심하는 이는 없다. 부지런히 발전하고 확장해왔다. 이젠 ‘멋지고 이상한 여자’들이 몰려왔다. 그다음은 무얼까? 분명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달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기대만으로도 벅차다.
이자연 <어제 그거 봤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