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9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열렸던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전시장의 일부 모습이다. 18세기 조선 후기 대화가 겸재 정선의 대표작 <인왕제색도>와 단원 김홍도의 수작인 <추성부도>가 안쪽 벽면에 걸려 있고 앞쪽 진열장에는 15세기 한글문헌인 <석보상절>을 비롯한 주요 고서적 기증품 등이 보인다.
국가전시기관이 기증받은 유물과 작품들을 기증자 동의 없이 다른 국가기관에 떼어주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지난 10일 정부 발표를 통해 2027년 목표로 서울 송현동 땅에 세우기로 확정된 ‘이건희 기증관’이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삼성가 유족의 기증처 지정으로 유물을 인계받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상한 행보 때문이다. 두 기관은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송현동 기증관 건립 발표 직후인 11·12일 잇따라 모든 기증품을 인계하겠다고 다짐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지난 7월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1전시실에 차려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의 전시장 모습. 가장 안쪽 벽에 김환기의 1950년대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가, 왼쪽 벽에는 국민 화가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 연작이 내걸려 있다.
‘조사연구를 완료한 기증작품들은 2027년 목표로 설립되는 (가칭)이건희 기증관에 인계한다. 이후 (…) 소장품 관리 및 활용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기관(미술관) 차원에서 적극 협력할 예정이다.’
‘고 이 회장 기증품은 1946년 이래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받은 문화재의 약 60%에 달하는 양으로 (…) 새로 개관하는 이건희 기증관에 추후 전량 인계될 예정이다.’
이런 내용의 보도자료는 유족 동의도 받지 않고 기증받은 유물들을 다른 신설 기관에 주겠다고 공식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상부 기관인 문체부 관계자는 “삼성가가 국가에 기증한 것이므로 국립기관의 소장처 이관은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1전시실에 차려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의 전시장 일부. 조각 거장 권진규의 자소상과 한국화 대가 김기창의 대작 <군마도>가 나와 있다.
미술계와 문화재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컬렉션의 확충과 향상이 지상목표인 국가대표 미술관·박물관의 학예직 전문가들이 기증받은 최고의 컬렉션을 제 발로 차버리겠다고 선언한 셈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2만1000여점의 작품을 기증받았을 당시 두 기관은 축제 분위기 일색이었다. 윤범모·민병찬 관장과 내부 관계자들은 ‘세기의 기증이자 최고 경사’ ‘빈약했던 국립기관 컬렉션의 양과 질을 비약적으로 개선시켰다’고 평가했다.
특히 미술관 쪽은 소장품 1만점을 돌파했다고 홍보하면서 피카소, 달리, 모네 등 서구 거장 컬렉션에 김환기의 대형 점화, 국민 화가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의 대표작들로 세계적 미술관으로 도약할 계기가 마련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범모 관장은 기자들에게 “전무후무한 최고작의 기증으로 행복 관장이 됐다”는 자랑까지 했다.
그런데 학예직들이 기증관의 조직 편제에 얽힌 정체성 문제와 수장고 건립 여부 등을 놓고 상부 문체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한겨레> 보도(11월11일치 20면)가 나오자, 두 기관은 컬렉션을 떼주겠다고 다짐하는 공식입장을 잇따라 밝히면서 180도 달라진 행보를 보여준 것이다.
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유물의 일부인 5세기 전반 가야시대의 말 모양 장식 받침 뿔잔. 가야시대 특유의 동물 모양 토기를 대표하는 명품이다.
소장처를 지정해 기증한 컬렉션을 소장자·전문가들과의 충분한 상의 없이 떼어내 새 전시기관에 넣는 것은 난센스다. 협소한 터에 무리하게 수장고와 독립편제를 갖춘 기증관 건립을, 내부 조율은 물론 문화계 공론 절차 없이 강행하려는 데 대해 내부 학예사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의견 또한 뚜렷하게 확인된다. 미술관·박물관 안팎에선 문체부의 일방적 지시와 강권에 두 기관 간부진이 굴복한 것이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그런데도 박물관 학예실 간부는 “내부 이견이 없고 컬렉션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술계 한 중견 기획자는 “기증관으로 컬렉션을 모두 넘기고 직제와 수장고까지 새로 만들면,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은 예산·인력 증원이 어려워져 사실상 찬밥 신세가 된다.
현재 있는 전문가 기관도 제대로 지원 못 하면서 새 기관을 설립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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