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선수가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뻐하고 있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야구선수와 노점상인.
유명인과 생활인의 빛살 틔우는 삶을 기록한 휴먼 다큐멘터리 두편이 11일 동시에 개봉한다. 조은성 감독의 <1984 최동원>과 김진열 감독의 <왕십리 김종분>은, 투혼으로 기적을 일궈낸 운동선수와 고통을 딛고 가족을 건사해낸 노점상 할머니를 통해 살아가는 일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1984 최동원>은 ‘무쇠팔’과 ‘부산의 심장’으로 불린 롯데 자이언츠 투수 최동원의 1984년 활약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가을의 기적’이라 불린,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한국시리즈였던 그해, 최동원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시리즈 7차전 중 다섯 경기에 등판해, 거짓말 같은 4승1패를 기록하며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모두가 절대강자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던 상황. 체력 관리를 위해선 하루 던지고 무조건 하루 쉬어야 하지만, 그는 단 두차례 경기를 제외하고 등판해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야구팬들이라면 영원히 기억할 레전드, 한국시리즈 최고의 주인공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 당시 최동원 선수. 트리플픽쳐스 제공
19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집회에 참여하거나 언론노조 총파업에 무기명 후원금을 내기도 했던 그는,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하는 등 선수들의 권익 신장에도 힘을 보탰다. 술·담배를 하기는커녕 고기조차 잘 먹지 않았다던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장암이었다.
최동원 선수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나온 <1984 최동원>은, 당시 경기 실황은 물론,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희귀 영상까지 담아내며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인간 최동원을 다각도로 복원했다. 무엇보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 강병철 감독과 임호균, 김용철, 김용희, 한문연 선수를 비롯해 상대 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투수 김시진과 김일융, 그리고 이만수 선수 등의 인터뷰를 통해 37년 전 드라마를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최동원 선수의 어머니가 아들의 동상을 닦고 있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조 감독은 “80년대에는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두곳 자료 외에는 개인 자료들이 대부분이라 아카이브를 구하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며 “37년 전이라 기억의 한계도 뚜렷해, 미리 준비한 질문이 현장에서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다행히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보석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1984 최동원>이 마운드라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스물다섯살 청년의 분투를 그려냈다면, <왕십리 김종분>은 반평생 같은 자리를 지켜온 한 노점상 할머니의 생을 조명한 작품이다. 50여년 전 남편을 대신해 노점을 연 김종분 할머니는 오늘도 서울 왕십리역 11번 출구 앞에서 길 위의 삶을 이어간다. 잔돈 없으면 물건 값을 나중에 달라 하고, 손님에게 되레 돈을 꿔주기도 하는 김 할머니는 그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기 위해 여든이 넘어서도 노점으로 향한다. 쉬는 날 이웃 상인들과 함께 맛난 음식을 해 먹거나 점심 나들이를 가고 그들과 화투를 치며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따스하고 정겹다. 특히 30여년 전 3만원을 꿔갔다는 한 사내가 찾아와 모과와 함께 5만원을 건네는 장면은, 억척스럽지 않고 순하게 살아온 김 할머니의 인생을 보여준다.
다큐영화 <왕십리 김종분>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그렇다고 춥고 바람 불지 않던 날이 있었을까. 자신은 못 배웠지만 공부 잘해 대학에 들어간 대견한 딸, 아르바이트로 대학 등록금을 벌면서도 새벽까지 엄마를 기다리던 착한 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일은 김 할머니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았다. 1991년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시위 도중 숨진 김귀정 열사가 바로 그 딸이다. 이후 김 할머니는 “제2의 귀정이가 나오면 안 된다”며 시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다큐영화 <왕십리 김종분>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왕십리 김종분>은 김귀정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담아내면서 김 할머니와 가족들을 비롯해 그날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진다. 대학 동문들은 매년 열린 추모식에 함께했고, 몇몇은 김 할머니의 노점을 찾아 딸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모두의 슬픔이 풍화돼갈 때, 늙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 남아서 딸의 비석을 쓸어내리며 운다. 눈 오던 지난 겨울날, 김 할머니가 장사를 마치고 손수레를 끌며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의 신산한 일생인 것만 같아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앉아 있게 만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다큐영화 <왕십리 김종분>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