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 줄 넘긴 ‘비엔날레의 남자들’이 돌아왔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광주·부산비엔날레의 기틀을 놓은 큐레이터 이영철(64) 계원예술대 교수와 2015~17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를 지낸 박양우(63)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위기에 빠진 비엔날레 두곳의 회생을 위해 구원투수로 나섰다. 비엔날레는 2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국제미술제. 이 교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이탈리아 베네치아비엔날레 내년 59회 행사의 한국관 전시 감독에 최근 선임됐다. 사상 초유의 재심사 사태와 심사위원단 총사퇴·재구성 등 곡절 끝에 감독 자리에 올랐다. 박 전 장관도 전임 감독과 직원들의 내홍에 휩싸인 광주비엔날레 새 대표이사로 26일 취임했다. 과거 대표이사를 지낸 이가 재임하는 것은 처음이다. 비엔날레 새 틀 짜기에 부심 중인 두 사령탑을 <한겨레>가 잇따라 만났다.
![지난 21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영철 기획자. 그는 예술에 나이와 세대론은 필요없다고 했다. 지난 21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영철 기획자. 그는 예술에 나이와 세대론은 필요없다고 했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70/728/imgdb/original/2021/0826/20210826503860.jpg)
지난 21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영철 기획자. 그는 예술에 나이와 세대론은 필요없다고 했다.
“과학+예술 실험실 차린다” “예술에 나이가 있나요? 왜 세대론으로 재단하죠? 내가 존경하는 위대한 기획자 하랄트 제만은 노년에도 전시를 만들다 죽었어요.” 이영철 교수는 항변하듯 말했다. 육십 줄에 이례적으로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사령탑이 된 데 대해 젊은 기획자들이 눈총을 보낼 수 있다고 기자가 말하자 꺼낸 대답이었다. “나이 많은 이의 전시 기획은 무조건 낡았다는 것, 후배들 앞에 왜 선배가 끼느냐는 식의 지적이 바로 꼰대의 논리”라고 했다. 한국 미술계의 대표적인 실력파 큐레이터로 꼽히는 그는 명전시들을 만들었다. 하랄트 제만이 기획자로 참여한 2회 광주비엔날레, 주재환, 양혜규, 김홍석 등 대표 작가들을 부각시킨 ‘도시와 영상’전(1998), 한국 실험미술의 위상을 복권시켰던 ‘당신은 나의 태양’전(2004) 등이다. 그간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감독은 2000년대 초반 이래 계속 아래 세대로 내려오면서 여성 중심의 신진 기획자들이 중견 스타 기획자로 가는 등용문처럼 인식되었다. 이런 도식을 깨어버린 셈이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한 전자음악가 출신의 50대 초 소장작가 김윤철과 손잡고 물리학, 공학, 화학 등이 철학, 역사 등의 인문학과 어우러지는 융·복합적 전시를 만들어 세계 무대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겠다고 했다. “문명이 야기한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기존 시각 질서는 무너졌어요. 거대 이벤트로 대표되는 이미지 스펙터클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 거죠. 이런 절박한 변화를 반영한 전시를 내보이고 싶습니다.” 그가 꿈꾸는 한국관 전시장은 파천황적인 발상으로 차 있다. “옥상 꼭대기에서 태양 빛을 빨아들여 컴컴한 전시장에 빛살로 내리꽂고 안에서 유기적인 생명체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꿀렁거리며 흘러가는, 기기묘묘하고 놀라운 숲속 오두막이 콘셉트예요.” 세련되고 매끈하게 표현했던 기존 한국관 전시들과 달리 사물과 인간, 자연이 어울리며 빚어내는 거칠고도 역동적인 요소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 미술무대에 나름의 목소리로 강력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밝힌 그는 9월 말까지 자연과학자, 공학자, 인문학자, 종교학자들과의 토론을 통해 담론적 틀을 닦고 10월부터 전시 뼈대 짜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한국관은 생명을 품은 자궁 같은 공간이 될 겁니다. 제 머릿속은 그걸 어떻게 입체적으로 구현할지에 대한 즐거운 상상으로 가득합니다!”
![지난 23일 낮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신임 대표이사. 줄무늬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나온 그는 전면적 혁신을 화두로 내놓았다. 지난 23일 낮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신임 대표이사. 줄무늬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나온 그는 전면적 혁신을 화두로 내놓았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70/1294/imgdb/original/2021/0826/20210826503861.jpg)
지난 23일 낮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신임 대표이사. 줄무늬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나온 그는 전면적 혁신을 화두로 내놓았다.
“비엔날레 본질부터 짚겠다” “전임 감독과 직원들 사이 갈등으로 조직이 위기라고 들었어요. 사실 다시 살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제 고민은 비대면의 위기 시대에 과연 큰 볼거리의 비엔날레 이벤트가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23일 낮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만난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광주시장님 간청으로 다시 대표이사를 맡기로 결심하면서 당장 비엔날레의 기본적 정체성에 대해 살펴야겠다는 생각부터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술계 전문가들과 비엔날레의 과거와 미래, 기본적 정체성과 방향성에 대해 논의하는 포럼 형태의 자리를 구상 중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정년이 1년 남은 중앙대 예술경영 전공 교수직은 아예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비엔날레다운 비엔날레를 해야죠. 지금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비엔날레인데 차별성이 없다면 구태여 할 이유가 없어요.” 그는 2015~17년 재직 당시 박근혜 정권의 외압 논란으로 비틀거리던 광주비엔날레를 다시 본궤도에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도 위기에 처한 조직을 추슬러야 한다는 점에서 연거푸 구원투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이번에 재임하게 된 그는 혁신과 파격이 우선적인 화두가 될 것임을 인터뷰 내내 내비쳤다. 전시 방식과 전시 공간, 재단 운영 등 비엔날레 핵심 요소에서 기존 관행을 벗어나 파격과 새 틀 짜기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옛 전남도청 자리에 광주 정신을 형상화한 광주아시아문화전당(ACC)에 주요 전시를 넣는 것이 역사적·공간적으로 타당하다고 봅니다. 최고의 지역 건축문화 콘텐츠로서 가치를 빛내는 가장 적절한 방도이고요. 내년 전시 이후부터 추진하려 합니다.” 전시감독도 파격적 인선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아냥을 듣는 외국 비엔날레 기획자 중심의 인선 방식에서 벗어나 국내 인디미술계까지 포함해 능력 있는 청장년 기획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의향을 비쳤다. 이와 함께 비엔날레 운영의 주축인 사무국을 강화하겠다는 복안도 내놓았다. “비엔날레 전시 운영의 보이지 않는 핵심 뼈대인데, 국외 인맥이 있고 업무 능력이 출중한 사무국 출신 인재들이 지금 미술계 도처에 흩어져 있어요. 이들을 가능한 한 다시 모으고 모아 비엔날레 재건의 주역으로 삼고 싶습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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