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인사동 코트 안주영 대표
지난 6월 말 서울 도심 한복판인 종로구 인사1길 피맛골 끝자락 재개발공사 터에서 15세기 훈민정음 활자 1600여점이 쏟아져나와 큰 화제가 됐다. 하지만 바로 그 옆에 60년 넘은 낡은 건물들을 그대로 살린 복합문화공간 ‘인사동 코트(KOTE)’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500평 넓이의 터에 세개의 건물을 연결해 다양한 분야 예술인과 창작자 수십명에게 공유공간으로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믿기지 않는다.
“시작은 순전히 오동나무 때문이었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다들 농담인 줄 알고 웃는데요, 저한테는 정말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공간 이름 ‘코트’도 꽃과 뜰의 합성어로, ‘뜰에 핀 꽃’, ‘경계의 뜰에 핀 오동나무꽃’이란 뜻으로 지었어요.”
지난 3일 인사동 코트의 대표 안주영(53)씨에게 이처럼 특별한 공간을 운영하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인사동 초입 60년 낡은 건물 500여평
4년간 우여곡절·코로나 위기 넘기고
빈티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시켜
다양한 예술인 창작자 공유공간 제공
‘월 30만원’ 착한 임대료로 더 주목 “20대부터 꿈꾸던 ‘공간의 공정무역’ 시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어릴 때 올라와 초등학교 때 살았던 분당의 집 마당에도 오동나무가 있었어요. 유년의 꿈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죠. 그런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오동나무 거목이 건물에 포위당한 채 죽어가고 있었어요. 나무를 껴안고 한참을 울면서 어떻게든 살려야겠다고 결심했죠.”
안 대표는 2016년 처음 오동나무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건물주가 1960년대부터 소유해온 판잣집들인데 한 시행업자가 10년 장기임차를 검토하고 있다고, 건축하는 지인이 소개를 해줬어요. 그때는 2, 3층짜리 여러개의 건물을 얼기설기 연결해놓았고, 층마다 음식점 노래방 등이 들어차 있었고, 오랫동안 수리를 한 적이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오동나무를 본 순간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투자자로 뛰어들게 되었죠.”
하지만 그가 실제로 오동나무를 구하고 코트를 열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동나무 주변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 정원을 꾸미고 주 건물 3개동만 남겨 리모델링을 했다. 그런데 한 디자인업체와 5년간 매월 억대의 임대료를 받기로 계약을 맺은 뒤 공동투자자와 연락이 두절되었고, 안 대표는 지분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투자 계약서조차 쓰지 않았던 불찰”로 속수무책이었던 그에게 2018년 “디자인업체가 철수하게 되어 계약이 파기되자” 비로소 도움 요청이 왔다. 다시 전시관과 마켓을 열고 팝업 레스토랑 등을 하니 독립요리점 제안이 오는 등 ‘기적’ 같은 일이 있었으나, 파트너는 2019년 봄 더 비싼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업체를 들이겠다며 그에게 손을 떼도록 했다.
그러나 그 업체와도 실패하자 6개월쯤 뒤 공동 투자자는 또다시 그를 찾았다. “그때서야 한 사립대학 재단 소유주였던 건물주를 소개해줬어요. 이번에는 부채를 떠안는 대신 운영 전권을 갖는 조건으로 5 대 5 정식 계약서를 썼어요.”
다시 운영을 맡으면서, 앞서 공동투자자가 유치해 협의중이던 유명 스포츠용품 업체 매장이 1층에 입주했는데 뜻밖의 전화위복이 됐다, “스포츠용품 업체에서 방탄소년단(BTS)을 홍보모델로 삼아 이벤트를 열면서 ‘굿즈’ 사은 행사를 했는데, 직원의 실수로 분쟁이 생겼어요. 대신 수습에 나서보니 비티에스의 팬클럽인 ‘아미’가 당사자였어요. 그 인연으로 아미들이 코트 1호 입주자가 되었어요”
그 직후 코로나가 터졌지만 더 열심히 노력한 그는 본관 2층을 창작자들의 공유공간 ‘코트랩’으로 꾸며 입주자들을 모았고, 칸막이 없이 열린 공간에 작업 테이블 2개씩을 기준으로 월 임대료가 30만원이니까, 차츰 소문이 나면서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코로나가 잠시 가라앉으며 운영이 제법 잘 되는 듯하자 지난해 5월 어느 날 새벽 공동투자자는 용역 대원들을 끌고 와 건물을 무단점유하려고 시도했다. “마침 그때 아미들이 건물 안에 있다가 즉시 알려준 덕분에 신고를 할 수 있었고 경찰이 출동해 용역들을 막아줬어요.”
그런 소동 끝에 공동투자자는 여러 명목으로 그를 고발하기도 했으나, 최근 모두 ‘무혐의’ 결정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공동투자자와 비전이 달라서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로나 위기가 저에게는 코트를 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할 시간을 버는 기회가 됐어요. 물론 아직은 적자이지만, 전세계적인 코로나 유행으로 활동이 정지되면서 잇따라 귀국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들고 있어요. 칸막이 없는 랩에서 서로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고 정보를 나누며 새로운 기획과 아이디어를 찾는 ‘콜라보’와 ‘용광로 효과’도 생기고 있고요.”
4층짜리 본관 코트스페이스의 2층에 자리한 코트랩에는 영화, 사진, 무용, 그림, 디자인, 그래픽, 패션,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40여명이 둥지를 틀고 있고, ‘내면의 서재’에는 저마다 소장한 책을 모으고 있다. 5층짜리 해봉빌딩에는 인공지능 자동화 스타트업, 공공장소나 상업공간에 설치하는 디스플레이 스크린 전문 사이니지 회사, 로봇이 세공하는 주얼리 회사 등이 자리했고, 코트 쇼케이스, 코트 카페, 내면의 서재, 코트라이브 등은 공유공간으로 누구나 빌려 쓸 수 있다. 공간마다 브랜드 팝업, 편집숍, 촬영스튜디오 등이 자리하고, 북토크·워크숍·강연회·전시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현재는 예술시장 코트 잼마켓이 24일까지 열린다.
안 대표는 “날마다 새로운 행사와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 30년 꿈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대학 때 영어 동아리 ‘타임 강독반’을 했고 이익훈어학원과 파고다학원에서 5년간 <타임> 독해 강의를 한 덕분에 <타임> 아시아판을 발행한 유피에이(UPA·전 우일문화사) 창립자 신창호 회장님을 알게 됐어요. 한때는 사전 만들기 프로젝트도 했는데 그 실력을 인정받아 27살 때 한글판 <타임연구> 편집장도 맡았어요. 그때 신 회장님께서 피천득·조병화 선생님 등 문인 예술인들과 대학로 샘터사 1층에서 자주 만나셨는데, 샘터사의 정신이 너무 좋았어요. 그때부터 ‘공간의 공정무역’이 제 인생의 꿈이 됐어요.”
편집장 경력은 짧게 끝났지만, 그는 평생토록 신 회장을 ‘멘토’로 삼고 꿈을 이룰 ‘경제적 자유’를 키웠다고 했다. 통역사로 견문을 넓히고 국제적인 자산관리회사와 외국계 사모펀드에서 일하던 그는 부동산 컨설팅업체 소속으로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고, 명동성당 지하 신자 지원시설(1898)를 비롯해 롯데의 뉴욕 팰리스호텔 인수 프로젝트, 이태원 유엔사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신의 가호로 성사된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서 제법 목돈을 받았을 때, 코트를 발견했어요. 알고보니 이곳이 바로 옆 승동교회 등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들이 모였던 터이기도 했어요. 이 소중한 공간을 지켜주신 분들과 함께, 쓰러져 있는 사람들 일으켜 세우는 ‘문화독립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싶어요.”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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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문화공간 인사동 코트 안주영 대표가 지난 3일 본관 2층의 별실에서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오동나무 거목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김경애 기자
4년간 우여곡절·코로나 위기 넘기고
빈티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시켜
다양한 예술인 창작자 공유공간 제공
‘월 30만원’ 착한 임대료로 더 주목 “20대부터 꿈꾸던 ‘공간의 공정무역’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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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영 대표가 2016년 처음 발견한 오동나무는 사진처럼 건물들 속에 포위당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사진 인사동 코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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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주변 200평 건물을 철거해 새로 꾸민 정원. 인사동 코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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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오동나무 정원에서 바라본 본관 쪽 야경. 사진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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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코트 옥상에서 앞쪽으로 최근 훈민정음 활자 1600여개가 무더기로 발굴된 종로 피맛골 끝자락 재개발 구역 공사 현장이 보인다. 사진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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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영 대표의 뒷편으로 본관 코트스페이스 2층의 오픈공간인 코트랩이 펼쳐져 있다. 인사동 코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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