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상을 받고,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킹덤> 등 한국 콘텐츠들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한국 배우들에 대한 세계적인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세계 최대 영상 콘텐츠 프랜차이즈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한국 배우가 진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15년 개봉했던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한국의 과학자 헬렌 조를 연기한 수현, 오는 11월 개봉 예정인 <이터널스>에 길가메시로 나오는 마동석에 이어, 얼마 전 박서준도 <더 마블스>에 캐스팅됐다는 소문이 뉴스를 탔다. 소속사는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지만, 마블 캐스팅은 확정 발표 전까지 매번 이런 식이어서 가능성이 없지 않다.
<더 마블스>는 2019년 개봉했던 <캡틴 마블>의 후속작이다. 만약 박서준이 캐스팅됐다면 캡틴 마-벨일 가능성이 높다. 캐럴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거듭나기 전부터 멘토 구실을 하고, 힘을 물려준 인물이다. <캡틴 마블>에서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의 상사이자 멘토로 나온 웬디 로슨(아네트 베닝)이 마-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기에 박서준이 이 역을 맡는 게 설정 충돌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작 코믹스에서 캡틴 마-벨이 남자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이 등장한 적이 있기에 여지는 있다.
캡틴 마-벨은 외계 행성 크리족 출신임에도 지구인들과 동료들을 위해 희생한다. 강력한 초능력은 물론이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움까지 갖춘 히어로다. 박서준은 여러 작품에서 강력한 액션 연기와 탄탄한 몸을 선보인 바 있다. 영화 <사자>에서 격투기 챔피언 용후 역을 맡아 검은 주교를 때려잡는(!) 모습은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JTBC)에서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리더십의 박새로이를 연기한 박서준은 캡틴 마-벨에 더없이 적합해 보인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 제이티비시 제공
엠시유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한국인 캐릭터로 가장 많이 거론된 배역은 아마데우스 조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수현이 연기한 헬렌 조의 아들인 한국계 미국인 2세로, 초능력 없이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두뇌 능력만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다. 기계 다루기에 능하고 머리 좋은 한국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 캐릭터인 듯도 싶지만, 아시아계 히어로 중 가장 인지도 높고 성공한 캐릭터 중 하나다.
내년에 오티티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할 예정인 시리즈 <쉬헐크>에 <어벤져스>의 헐크, 브루스 배너 박사가 등장한다는 것이 확정되면서, 원작 코믹스에서 헐크의 후계자가 되는 아마데우스 조의 등장도 점쳐지고 있다. 아마데우스 조의 통통 튀고 재치 넘치는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박서준이 이 역에 캐스팅됐을 가능성도 있다.
마블 코믹스 속 아마데우스 조. 코믹스 갈무리
소년다운 순수함과 뛰어난 두뇌, 재기발랄한 면모를 지닌 아마데우스 조에게서 박서준이 지금껏 쌓아온 필모그래피 속 캐릭터들이 겹쳐 보인다. 드라마 <쌈, 마이웨이>(한국방송2)에서 보여준 불안하면서도 명랑한 청춘, 영화 <청년경찰>에서 보여준 재기발랄하고 뭔가 부족한 듯하지만 정의감 넘치는 모습을 떠올리면, 아마데우스 조 역에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엠시유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멀티버스(다중우주) 세계관에다 <캡틴 마블>에서 소개된 스크럴족의 특징을 더하면 뭐든 가능하다. <캡틴 마블> 예고편에서 캡틴 마블이 할머니에게 주먹질하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이 할머니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 스크럴족이었다. 외모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스크럴족의 특징을 활용한다면 박서준은 뭐든 될 수 있다.
영화 <청년경찰>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캡틴 마블은 엠시유에서, 본래 지구인이었으나 크리 행성에서 요원으로 길러진 인물로, 크리족과 스크럴족의 싸움 속에서 스크럴족이 오랜 세월 동안 힘겨운 전투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스크럴족 편에 서게 된다. 이에 따라 세계관 내 어디에나 스크럴족이 존재할 수 있게 된 셈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존재들이 스크럴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통해 처음 제시된 멀티버스 개념은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들을 통해 점차 정립돼가고 있다. 이를 통해서라면 앞서 캡틴 마-벨이 현재 차원에서는 이미 죽었을지라도, 다른 차원에서는 살아 있다는 설정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박서준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해질 수 있다.
마블 코믹스 속 멀티버스 개념. 코믹스 갈무리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은 꽤 힘든 일처럼 보였다. 이병헌, 정지훈(비), 배두나 등이 활약한 바 있으나, 주연급을 맡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몇몇 배우가 영 뚫지 못할 관문 같았던 엠시유에 입성한 만큼, 앞으로 원작 코믹스의 한국인 캐릭터들이 좀 더 많이 마블 실사화 프로젝트에 등장해준다면 더 많은 한국 배우들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겠다.
이종훈 슈퍼히어로 전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