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빈은 독주회에서 나무로 만든 플루트로 연주를 한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굳은살이 생기는 등 관악 연주자들은 ‘의외의’ 직업병도 많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관악기는 무대 뒤로!”
지난해 가을 미국 유타 심포니는 무대 위 연주자들의 자리를 재배치했다. 마스크를 쓸 수 있는 타악기 연주자는 무대 끝에서 중앙으로, 호흡으로 소리를 내야 하는 관악기 연주자는 중앙에서 출입문과 가까운 뒷줄과 사이드로 옮겨 앉게 했다. 미국 유타대 연구진이 실험을 통해 “관악기 연주자들을 무대 뒤에 배치하면 공기 미립자(에어로졸) 배출이 최소화되는 것을 확인했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한 내용에 따른 것이다. 국내 클래식 관계자들도 “관악기 연주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기 어려워 특히 더 조심해야 할 처지”라고 말한다.
“오케스트라 내 자리는 권력과 연관 있다”는 소설 <콘트라바스> 속 얘기가 맞는다면, 팬데믹 시대에 관악기의 입지가 좁아진 걸까? 관객들의 관심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오케스트라 관람 기회가 줄면서 조용한 독주회를 찾는 발걸음이 늘고 있는 가운데, 마음의 힐링이 필요한 관객들은 특히 관악기에 주목한다. 한 클래식 팬은 “호흡으로 소리 내는 관악기의 자연스럽고 따뜻한 음색에 마음이 치유받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 관심을 반영해 흔치 않은 관악기 독주회가 올여름 잇따라 열린다. 2016년 19살에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최연소 수석이 된 플루티스트 김유빈이 8월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블루밍 바로크’ 공연으로 국내 팬을 만난다.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에서 활동하는 오보이스트 함경은 8월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아이비케이챔버홀 무대에 서고, 유럽에서 활동하는 바수니스트 이은호도 오는 25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독주회를 연다.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인 호르니스트 김홍박은 지난 12일(광주), 17일(서울) 공연했다. 그는 8월 ‘평창 대관령 음악제’ 무대에도 선다.
이은호의 국내 독주회는 대학교 1학년 때 이후 처음이다. 김홍박과 김유빈은 3년 만이다. “유럽은 7·8월이 휴가 기간이라 한국인 관악기 연주자들은 이때 국내에서 독주회를 많이 갖는 편”(김유빈)이라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독주회가 더 많아졌다.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 격상에 대형 공연장을 찾는 마음이 무겁다면, 관악기에 대한 궁금증만 풀어도 좋다. 김유빈에겐 대면으로, 김홍박과 이은호에겐 전화로, 핀란드에 있는 함경에겐 서면으로 관악기의 매력을 물어봤다.
■ 아니 관악기에서 이런 음이? 오케스트라 공연 직전 악기들은 오보에 소리에 맞춰 조율한다. 오보에는 파장이 일정해 많은 악기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내도 정확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에서 관악기들은 다른 악기를 받쳐주는 역할이어서 다양한 소리를 낼 기회가 없다. 그래서 관악기 독주회는 소중한 경험이다.
김유빈·함경·이은호·김홍박이 가장 신경 쓴 것도 “관악기의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바순은 목관악기 중 음역대가 가장 낮고, 플루트는 천사의 소리라 불릴 정도로 영롱하다. 호른은 웅장한 음색이 매력이다. 그런데 장소를 독주회로 옮기면 소리를 한마디로 특정지을 수 없게 된다. ‘관악기에서 이런 소리가?’ 할 정도로 한계를 넘는 다채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김유빈은 “플루트 하면 새소리를 연상하는데, 역동적이고 힘 있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이은호는 “바순이 낼 수 있는 가장 저음부터 가장 고음까지 다채롭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관객이 다소 어렵고 낯설게 느끼더라도 악기의 개성을 뽐낼 수 있는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저마다 ‘이런 곡을 관악기가 구현해낼 수 있을까?’ 싶은 곡들이 눈에 띈다. 이은호는 바흐, 드비엔, 생상스 등을 선곡해 다양한 연주기법을 준비했다. 현대곡인 하인츠 홀리거의 ‘바순 솔로를 위한 세 개의 작품 중 3악장’은 연주가 어려워서 바수니스트들이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곡이다. 이은호는 “보통 곡을 습득하는 기간이 1개월이라면, 이 곡은 3개월 정도”라며 “바순이 독주했을 때 ‘비르투오소’적인(기교가 돋보이는) 악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특히 김유빈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우드(나무) 플루트’로 바로크 시대 곡을 연주해 화제를 모은다. 플루트로 바로크 시대를 표현한 독주회도 드물지만, 우드 플루트를 활용하는 건 더 없는 일이다. 김유빈은 “연주자로서도 도전이지만 플루트의 깊은 정통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플루트는 요즘은 금과 은으로 만들지만 시작은 나무였다.
■ 체력관리와 함께 중요한 것은? 입술 보호! 관악기 연주자들은 좋은 공연을 위해 몸과 마음 모두 갈고닦는다. 관악기 소리는 미세한 떨림에도 영향을 받기에 정확한 소리를 일정하게 꾸준히 내려면 마음도 편안해야 하고 체력도 좋아야 한다. 김홍박은 “무게가 3~4㎏ 되는 호른을 들고 1~2시간 내내 서서 호흡해야 해 독주회는 체력 소모가 크다”고 말했다. 독주회 영상을 보면 관악기 연주자들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호른은 기네스북에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로 올라 있다. 그래서 명성을 쌓은 연주자 중에는 꾸준히 운동하며 체력을 키운 이들이 많다. 함경은 “하루에 단 20분이라도 빼먹지 않고 운동하려고 한다. 자전거나 줄넘기, 조깅 등 호흡을 사용하고 땀 흘리는 운동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이은호는 “폐활량을 좋게 하는 유산소 운동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악기 연주자들이 보호하는 신체 부위는 또 있다. 바로 ‘입술’. 호흡을 세심하게 해야 하기에 입술의 예민한 감각을 지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입술의 감각이 좋아야 미세한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만의 비법도 많다. 김홍박은 “공연 전에는 절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다. 입술이 부으면 감각이 떨어져 호흡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김유빈도 “공연 전에 단것을 먹으면 침이 계속 고인다. 현악기 하는 친구들이 ‘너희는 먹으면서 공연 못 하지?’라고 장난처럼 얘기하기도 한다”며 웃었다. 입술의 예민함을 위해 꿀을 바르거나 입술 팩을 하는 연주자들도 있단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하면 호흡과 몸에 무리가 가기에 요령껏 해야 한다. 김홍박은 “하루 2~3시간 정도 매일 하는 게 중요하다. 휴가 때도 호른을 갖고 다녔다”고 말했다. 여행지 근처 연습장을 찾거나 차에서 연습하며 손에서 놓지 않는다. 수십년간 매일 하다 보면 어깨와 등이 아프고 손에 굳은살이 생기는 등 직업병이 나타난다. 김유빈은 “목보다는 오히려 자세 때문에 왼쪽 어깨가 아프다”고 했다. 입술 아래쪽 피부색이 살짝 검게 변해 있었다. “플루트 접촉 지점의 피부가 변하더라고요.”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는 굳은살이 도드라져 있었다. 호른은 혼자 여러 개의 키를 누르며 ‘열일’하는 왼손 엄지에 굳은살이 생기기 십상이다. 김홍박은 “호른을 감싸는 자세로 연주하기에 등이 굽고 허리도 자주 아프다”고 했다. “전 이 모든 직업병에 더해서 4~5㎏ 되는 무거운 바순을 들고 다니느라 키가 덜 컸어요. 하하.”(이은호)
침이나 이물질이 고이지 않게 적절한 때 관을 뚫어주는 등 악기 관리도 중요하다. 인간의 혈관처럼 어디 한군데 막히면 소리가 매끄럽지 않다. 특히 목관악기는 기온이 너무 낮으면 나무에 균열이 생길 수 있어 온도와 습도에 예민하다. 함경은 “항상 비슷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건조한 겨울에는 악기 안에 사과껍질을 넣어두면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는 오보에를 입술에 대고 부는 부분인 리드를 직접 깎고, 20~50개씩 갖고 다니며 환경에 따라 바꿔 장착한다. “아, 잠깐만요!” 김유빈도 인터뷰 도중 에어컨 바람이 강해지자 사진 촬영을 위해 꺼내놓은 우드 플루트를 다시 집어넣었다.
■ 관악기 ‘대중화’의 열쇠는? 이런 노력에도 관악기는 국내에서 여전히 피아노, 바이올린 등에 견줘 대중성이 떨어진다. 소리가 다채롭지 않고 간단한 악기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김유빈은 “플루트는 여성만 다루는 악기라는 단정도 한국에서 통용되는 선입견”이라고 했다. “직업이 플루티스트라고 말하면 ‘남자가?’ 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봐요.(웃음)” 요즘은 전세계적으로 남자 플루티스트도 많단다.
이들이 독주회를 여는 것도 관악기를 익숙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김유빈은 “관악기가 대중화되려면 자주 쉽게 접할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은호는 후배들과 5인조 ‘트로스트 바순 앙상블’을 결성해 8월28일 창단 공연을 한다. 그는 “앙상블 공연 때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편안하게 들려주며 바순을 익숙해지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김홍박은 “각 악기만을 위해 작곡한 레퍼토리가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입문’이 중요한데, 일단 듣고 나면 그 매력에 빠져들 것이라고 이들은 확신한다.
이들의 매력을 미리 알아보려면 유튜브 영상을 찾아봐도 좋다. 김유빈을 세계적으로 알린 ‘제네바 콩쿠르 본선 실황’에서 대범한 연주를 펼치는 ‘강심장’을 느낄 수 있다. 이은호는 “바순은 ‘모차르트 바순 협주곡’부터 들어보면 좋다”고 했다. 자신의 연주 중에서는 “25일 이후 공개될 유튜브 채널 ‘토마토 클래식’에서 이번 독주회와 같은 레퍼토리를 선보인다”며 “공연의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고 추천했다. 함경은 “풀랑크의 소나타, 슈트라우스 협주곡을 꼭 들어볼 것”을 권했다.
김홍박은 “<스타워즈> <쥬라기 공원> 등 수많은 영화의 배경음악에 호른이 자주 사용된다”고 했다. 인지를 잘 못했을 뿐, 관악기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일상에서 관악기 접할 기회가 적은 것을 아쉬워한다. 학원도 잘 없고, 악기 가격도 비싸다. 바순만 해도 제일 유명한 회사의 가장 비싼 건 1억원이 넘는다. 모든 바수니스트들이 이 회사 제품을 열망하지만, 생산량이 한정돼 있어 주문하면 10년 만에 받기도 한다. 이은호가 8년째 함께하는 바순도 4년 만에 받은 것이다. 취미용이라 해도 현악기 등에 견줘 비싼 편이다.
이런저런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2010년 이후 한국 관악 연주자들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는 데 있어 이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유빈은 10대 때 오케스트라 최연소 수석으로 임명됐고, 이듬해에는 정년을 보장받는 종신 수석이 됐을 정도다. 이들은 모두 소리에 반해 관악기를 집어 들었다. 김유빈은 콘트라바스 연주자인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취미로 배우라며 플루트를 선물한 것이 시작이다. 함경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보이스트인 아버지한테 오보에를 선물 받은 뒤 호소력 짙은 소리에 빠져들었다. 모두 한국에서 주목받는 악기가 아닌데도 스스로 선택해 길을 열었다. 그래서일까? “주옥같은 곡을 많이 알리는 것도 제 임무”라는 함경의 말에서 선배로서 책임감도 느껴진다. “자기계발 꾸준히 하고 더 자주 활동해 관악기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이들을 믿고 귀를 열어보자.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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