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저녁, 서울 씨지브이(CGV) 신촌아트레온에서 열린 ‘스탠드업 코미디 쇼그맨’ 공연에 앞서 관객들이 환호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2년 만에 처음으로 극장에 온 거 같아요. 설레고 좋네요. 집에서 티브이(TV) 보는 거랑 극장은 차원이 다르죠. 극장에 오면 제가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 같아요.”
지난 2일 저녁 8시, 서울 씨지브이(CGV) 신촌아트레온에서 만난 조광선(69)씨는 오랜만의 극장 나들이에 들떠 보였다. 중증 시각장애인인 그는 어릴 적 사고로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도 사물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검은색 셔츠와 검은색 모자, 선글라스로 멋 낸 그는, 시각장애인 활동보조인 윤만식(68)씨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았다.
이날 조씨가 극장에 온 것은 영화가 아닌 ‘스탠드업 코미디 쇼그맨’을 보기 위해서다. 코로나19로 관객이 줄어든 영화관과 무대가 사라진 개그맨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코미디쇼 ‘쇼그맨’은 지난 2월부터 매주 금요일에 씨지브이 신촌아트레온에서 공연되고 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접근성과 기존 공연의 명성이 만난 기획이다.
‘스탠드업 코미디 쇼그맨’ 공식 포스터. 씨지브이 제공
조씨를 포함해 이날 관객은 스무명 남짓이었다. 방역수칙에 따라 전체 객석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티켓을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였다. 2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친구부터 연인까지 관객층은 다양했다. 공연 시작 전, <개그콘서트>(한국방송2)에서 활동했던 개그맨 김재욱이 인사와 함께 앞자리 50대 남녀에게 말을 건넸다.
“두 선생님은 어떤 사이세요?” 남자가 답했다. “오다가 요 앞 콜라텍에서 만난 사이지.”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김재욱이 말했다. “네. 그래 보여요.”(관객들 웃음) 코미디쇼를 보러 온 관객답게 다들 웃을 준비가 돼 있었다. 김재욱의 소개와 함께 7명의 개그맨이 10~15분씩 코미디를 선보였다. 스탠드업 코미디라 별도의 세트 없이 오로지 말로만 개그를 펼쳤다. 시각장애인도 어려움 없이 코미디를 즐길 수 있는 이유다.
고등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개그맨 김동하는 친구 얘기로 코미디를 시작했다.
“제가 고등학교 교사 출신이거든요. 개그맨 된 지 5년 정도 됐을 때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니 개그맨 한 지 얼마나 됐나? 지금까지 뭐 했노? 티브이에도 안 나오고. 고마 때려쳐라.’ 생각할수록 진짜 나쁜 놈이죠. 더 세게 말렸어야지.”(관객들 웃음)
‘스탠드업 코미디 쇼그맨’에서 개그맨 한기명이 코미디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오승훈 기자
대한민국 최초의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한기명은 자신의 장애를 유머로 승화시켰다.
“전 장애인이거든요. 제 개그에 안 웃으시면 장애인 차별하는 거고요. 제 개그에 웃으시면 장애인 비하하는 겁니다.” 웃음이 삐져나오는데 그의 개그가 이어졌다.
“전 전철을 타고 다니거든요. 편하더라고요. 공짜니까. 얼마 전에 전철에 탔는데 한 어르신이 젊은이 앞에 서는 거예요.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이는 ‘난 절대 이 자리를 뺏기지 않을 거야’ 하는 표정이었죠. 그 어르신이 젊은이를 보고 ‘쯧쯧, 요새 젊은것들이란’이라고 말하니까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바로 이거다’ 싶었죠. 그 아저씨 앞에 섰더니 그 아저씨도 ‘여긴 내 자리야’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쯧쯧, 요새 비장애인들이란.’ 그랬더니 바로 자리를 양보하더라고요.”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코미디언 김재욱(맨 앞 서 있는 이)은 후배들의 공연 중간중간에 객석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했다. 오승훈 기자
1시간30분 동안 이어진 코미디쇼는 신인들의 열정과 관객들의 호응으로 뜨거웠다. 경증 시각장애인으로 ‘쇼그맨’ 공연을 두번째 관람한다는 심규철(43)씨는 “이런 공연은 일부러 접하려고 노력한다”며 “조금 더 개그 수위를 높였어도 좋았을 거 같다”고 했다. 그는 “방송보다 날것, 센 것을 접할 수 있어서 좋다. 공연 보고 온 장애인들 반응도 좋았다”고 했다. 심씨와 같은 줄에서 공연을 관람한 조씨는 “시종 웃고 호쾌한 시간을 보냈다”며 “다만 조금 지루한 대목도 있었는데 웃으려고 준비를 많이 해 와서 재밌었다”고 했다. 또 “이런 기회가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더 많이 제공되길 바란다. 비장애인과 함께 공유하는 자리가 늘어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조씨의 활동보조인 윤씨는 “장애인 코미디언이 기억에 남는다”며 “자신의 장애를 즐기면서 유머를 구사한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고 평했다. 씨지브이는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매주 금요일 공연 때마다 시각장애인연합회에 무료 관람권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60여명의 시각장애인이 ‘쇼그맨’을 관람했다.
시각장애인인 조광선(가운데)씨와 심규철(왼쪽)씨가 ‘스탠드업 코미디 쇼그맨’을 관람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이번 ‘쇼그맨’ 관람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1년여 동안 중단됐던 ‘배리어 프리’(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시설 이용 장벽을 없애는 일) 정책을 재개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씨지브이,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 3사는 2019년부터 화면해설 자막과 음성 지원 등을 통해 시·청각장애인들도 매달 2~3편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이른바 ‘가치봄’ 행사를 진행해오다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중단한 상태다.
해외 영화관의 배리어 프리 정책은 이미 대세가 된 지 오래다. 2018년 기준 6천개 스크린에서 화면해설 시스템을 구축한 미국에선 극장체인 대기업 3사(Regal, Cinemark, AMC: 전체 스크린의 42% 점유)가 주축이 돼 디지털화된 모든 영화관에서 자막과 화면해설에 필요한 장치 도입에 나서고 있다.
영국은 같은 해 기준 300여개 상영관에서 흥행 10위권 영화들이 모두 배리어 프리로 상영되고 있다. 영국 영화배급업체들은 대부분의 인기 작품에 자막과 화면해설을 붙여 출시한다. 유통되는 영화의 약 85%에 자막과 화면해설이 붙어 있다. 등록된 시각장애인의 경우 동반 1인까지 무료로 영화 관람이 가능한 혜택도 준다.
국내 장애인단체들은 배리어 프리 영화의 확대와 함께, 너무 많은 해설 장면이 비장애인에게 노출되는 ‘개방형’ 상영 방식이 아닌, 장애인이 특수안경이나 이어폰을 착용하고 영화를 보는 이른바 ‘폐쇄형’ 방식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불편함 없이 함께 영화를 봐야 한다는 취지다.
글·사진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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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장애인 코미디언 제 예명은 ‘뻔장코’입니다”
[인터뷰] 스탠드업 코미디언 한기명
“제 예명은 ‘뻔장코’입니다. 뻔뻔한 장애인 코미디언의 준말이죠. 뻔뻔한은 펀(Fun)펀한의 뜻도 있죠.”
‘뻔장코’ 한기명은 너스레로 인사를 대신했다. 지난 2일 저녁, 서울 씨지브이(CGV) 신촌아트레온에서 만난 한기명은 밝고 유쾌했다. ‘스탠드업 코미디 쇼그맨’에서 그는 자신의 장애를 유머 소재로 활용하는 여유로움을 보여줬다.
“7살 때였어요. 태권도 학원 차에서 내리는 도중에 차가 출발을 한 거예요. 크게 다쳐서 식물인간으로 6개월 동안 누워 있다가 겨우 깨어났어요. 그때 처음 본 프로그램이 <개그콘서트>에서 김준호·김대희 선배 등이 연기한 ‘바보 3대’였어요. 너무 재밌더라고요. 나도 누군가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그맨에 도전한 계기죠.” 어렸을 적 사고의 기억이 고통스러웠을 법도 한데 마치 남 얘기하듯 했다.
그날의 기억은 어린 그를 사로잡았다. 개그맨이 되기 위해선 연기를 해야겠다고 맘먹은 그는 2015년 장애인 연극배우 모집 공고에 지원했다. “당당하게 1등으로 합격한 거예요. 연기를 배운 적도 없었는데 드라마를 보고 혼자 연습한 게 도움이 됐어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는 과정은 우연이자 운명이었다. “2017년 ‘새로운 거에 도전하자’ 생각하고 있던 차에 ‘스탠드업 코미디언 오픈마이크’ 모집 공고를 봤어요. 스탠드업 코미디는 뭘까 하고 찾아보니 무대 위에서 자신의 얘길 하는 거였어요. 내가 하고 싶은 코미디가 바로 이거구나 싶어서 도전했죠.” 2018년 국내 최초의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감사하게도 그해에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 초청돼 공연했고 최근에는 박나래 선배하고 <한국방송>(KBS) 코미디 프로그램 <스탠드업>에 출연하는 영광도 누렸죠.”
개그맨의 꿈을 이루기까지 가족들의 반대도 없지 않았지만, 자신의 좌우명인 ‘디아이디’(DID·들이대)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그는, 지금은 폐지된 <개그콘서트> 무대에 언젠가 서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전철을 주로 타거든요. 공짜니까요.(웃음) 전철에서 소재를 많이 얻는데 사실 대본 짜는 게 가장 어려워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코로나19로 무대가 줄어들어 다들 힘들죠. 그나마 저는 장애인식 개선 강의나 장애인특수학교에서 진로특강 요청 등이 들어와서 다행이에요.”
미국의 뇌성마비 코미디언 조시 블루가 롤모델이라는 그는 매주 월요일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을 찾는다. “보통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생활하거든요. 근데 시설이 문제가 많죠. 탈시설 지원법 제정과 장애인들의 거주시설 보장을 위한 국회 앞 농성에 매주 나가고 있어요.”
왼쪽 귀는 안 들리고 왼쪽 뇌를 다쳐 오른쪽 손을 쓰지 못하는 그는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배리어 프리. 장벽이 없어야죠. 누구를 더 특별하게 봐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몸이 불편할 뿐 똑같은 사람이죠.”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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