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를 바라보며 치킨 피피엘을 하는 <라켓소년단> 장면. 화면 갈무리
떡볶이에 붙은 치즈가 쭈욱 늘어나는 장면이 화면 가득 잡힌다. “이 떡볶이 불나게 매운데 맛있다.” “들어는 봤냐. 이것이 차돌이다.” 이쯤 되면 시청자들도 다 안다. ‘아, 피피엘(PPL·간접광고)이구나.’ 그래, 중학생이 떡볶이 먹으며 나눌 수 있는 대화로 자연스럽게 잘 녹였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얼음’이 될지도 모른다. “근데 너네 누구한테 얘기하니?” 하고 묻는 이한솔(이지원)의 대사에 배우들 모두 일제히 나, 아니 카메라, 아니 시청자를 쳐다본다. 피피엘 대상인 시청자한테 하는 소리라는 뜻이다.
드라마 <라켓소년단>(에스비에스)의 이 깜찍한 피피엘이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화제다. 땅끝마을 해남의 한 중학교 배드민턴부를 지칭하는 ‘라켓소년단’이 대회에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답게 피피엘도 깜찍발랄하다. 어떻게 보면 대놓고 ‘이거 피피엘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건데도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고 불편하지도 않다. 드라마의 깜찍한 색깔과 잘 맞아떨어져서 되레 재미를 배가시킨다. 시청자들은 “이런 ‘피피엘 맛집’을 봤나”라고 별명까지 붙였다.
4. 일제히 카메라를 쳐다보며 시청자한테 말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라켓소년단>의 장면. 화면 갈무리
비슷한 연출은 9회에 한번 더 나온다. 훈련이 끝난 뒤 숙소에 둘러앉아 치킨을 먹으며 “치킨 짱 맛있지 않냐? 인정?” “이거 먹고 내일 시합도 무조건 이겨야지” 등의 대화를 하다가 사인이 다시 한번 들어온다. “근데 니들 누구한테 얘기해?”(이한솔) 애청자라면 안다. 지금부터 나를 보겠구나. 모두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한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다가 배우들과 눈 마주친 묘한 기분마저 들어 드라마에 동화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노골적인 피피엘이 되레 드라마와 시청자를 하나로 묶는 효과까지 주고 있다.
제작진은 드라마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내용인 만큼 피피엘을 어떻게 녹일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피피엘을 아예 안 할 수 없다면, 아이들이 주인공인 만큼 상업적인 냄새가 너무 풍기는 것은 삼가자는 데 의견을 맞췄다고 한다. 또래들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되, 이를 보는 또래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받아칠 수 있도록 연출한 것이다. 실제로 대본을 보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지문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2018년 <미스터 선샤인>은 플레이트 매트에 카페 상호명을 새기는 등 숨은 피피엘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화면 갈무리
피피엘을 프로그램 개성에 따라 표현하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다. 노골적인 피피엘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던 김은숙 작가는 시대극 <미스터 션샤인>(티브이엔)을 방송하면서 ‘불란서 제빵소’를 상점으로 꾸며놓고, 탁자에 까는 플레이트 매트에 카페 상호명을 적어놓는 묘수를 짜내어 한때 드라마 속 ‘피피엘 찾기’가 놀이처럼 여겨진 적도 있다. 최근 몇년 일상을 보여주는 관찰예능에서 제품을 평소 사용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고, 유튜브에서 광고 아닌 척 숨기고 하는 ‘뒷광고’가 논란이 되면서는 ‘대놓고 하는 피피엘’이 연출만 잘하면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한 예능프로 피디는 “제작비가 넉넉해 안 하는 게 가장 좋지만, 해야 한다면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이건 피피엘이니 판단하시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나은 것 같다”며 “광고에서는 오히려 솔직함이 더 무기가 됐다”고 말했다.
예능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도드라진다. 코로나19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대신 실내에서 촬영해야 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럭>(티브이엔)은 초대손님(연예인)의 자료사진 활용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자 장소 협찬을 피피엘로 제공받았다. 그럴 때마다 ‘아닌 척’하지 않고 어색한 상황극처럼 꾸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함께 준다. 예를 들어 조세호가 협찬 장소에 들어서면서 “우와”라고 감탄하면 유재석이 “피피엘을 그렇게 티 나게 하면 어떡해”라고 말하며 피피엘임을 ‘대놓고’ 얘기하는 식이다. 웹예능에서는 “잠시 제작비 좀 벌고 오겠다”고 광고 시간을 소개하기도 한다.
“피피엘인 거 너무 티 낸다”며 피피엘 하는 <유 퀴즈…> 장면. 화면 갈무리
하지만 <펜트하우스>(에스비에스)처럼 막 출소한 천서진(김소연)이 딸 하은별(최예빈)과 만난 카페에서 “이 빙수는 이렇게 먹어야 더 맛있어”라며 빙수를 퍼먹는 장면처럼 맥을 끊는 억지스러운 피피엘이 대부분이다. 마지막회는 ‘피피엘회’라고 불릴 정도로 그동안 소화하지 못 한 피피엘을 마구 집어넣는 경우도 많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트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에는 피피엘이 없다. 박세완이 배가 고프다고 말하자 제이미가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준다. 세완이 “이게 거기서 왜? 피피엘이야?”라고 묻지만, 오히려 이 장면은 피피엘이 아니다. 관계자는 “넷플릭스는 제작비가 풍족해 피피엘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며 “과자를 소품으로 사용해도 되는지 되레 허락을 구하고 브랜드가 보이지 않게 촬영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넷플릭스처럼 충분한 제작비 지원으로 피피엘을 하지 않아야 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국내에선 ‘선공급 후계약’ 관행으로 콘텐츠 대가를 제대로 못 받는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돼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발간한 ‘2020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2019년 기준 전체 매출 가운데 광고·협찬 매출이 지상파는 42%, 일반 피피(PP)는 59.3%에 이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피피엘이 어쩔 수 없다면 이야기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시청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영리하게 녹여야 한다. <라켓소년단>은 좋은 예”라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