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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불편한 집이 옳다’는 소신의 건축가 이일훈을 추모하며

등록 2021-07-06 10:25수정 2022-03-17 12:06

[가신이의 발자취]
고 이일훈 건축가. 건축연구소 후리 제공.
고 이일훈 건축가. 건축연구소 후리 제공.
고 이일훈 선생(건축연구소 후리 대표)을 처음 뵌 것은 20세기 말 홍대 앞 어느 술자리였다.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던 마음은 잠시였다. 종횡무진 전개되는 ‘건축 안팎 구라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뭐 이런 식이었다. 강을 즐기려면 전망 좋은 데를 찾지 말아라. 다리 밑에 가라. 본디 교량이라는 구조물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유속 느린 나루터나 건설비가 적게 드는 강폭 좁은 곳에 지어진다. 나루터에선 눈에 힘 빼고 느린 강을 봐라. 물살 세찬 다리 밑에선 빠른 강을 보며 눈을 식혀라. 그러면서 ‘내가 여러 번 해봐서 아는데’로 넘어갔다. 동터올 무렵까지 ‘교각주’ 회합을 하고 있노라면 새벽 조깅하는 이들이 한참 달리다가 다리 밑에 이르러 죄다 무릎을 꿇고 마는데…. 부질없이 부지런한 자신의 삶을 참회하기 때문이라나.

선생은 아름다운 풍경을 건물로 ‘소유’하는 데 반대하셨다. 바닷가 민박집 ‘재색불이’엔 일부러 작은 창을 냈다. 집밖으로 한 발짝만 나서면 바로 앞이 바다인데 실내에 비싼 통유리를 달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도피안사 향적당도 마찬가지였다. 숲속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큰 창을 원하는 스님에게 선방을 나가 숲길을 산책하면 될 일이라 설득하셨다.

볕 좋은 어느 토요일, 인천 만석동의 ‘기찻길 옆 공부방’을 함께 방문했을 때의 충격도 잊을 수 없다. 동네 집 숫자보다 화장실 숫자가 적은 달동네.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2층 공부방은 주변 단층 판잣집 사이에서 불쑥 솟아 있었지만, 마치 원래부터 만석동 식구였던 것처럼 마을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건축주는 선생에게 두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동네의 고유한 정서를 살려달라”, 그리고 “돈이 없다”. 가난의 빛깔을 숨기지 않는 공부방 앞에서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돈이 없어 불필요한 장식 없는 정직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하는 최상의 건축주였다.”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2010년 촬영한 기찻길 옆 공부방. 진효숙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2010년 촬영한 기찻길 옆 공부방. 진효숙 제공
가난한 건축주를 피하지 않았으니 그 역시 ‘가난한 건축가’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의 유고 속에 있었던 “뜻이 있는 곳에 돈이 없다”는 표현은 진심이었을 게다. 하지만 “나처럼 행복한 건축가가 없다”는 그의 말 또한 진실이었다. 워낙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교분이 넓고 깊은 분이셨지만 특히 건축주와 ‘친구’가 되는, 보기 드문 건축가였다. “어떤 집을 원하시냐”고 묻기 전에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냐”고 묻는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건축가란 재능과 기술을 공급하는 전문가 이전에 건축주와 삶의 방식을 상의하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은 까닭이었다.

‘짓는다’라는 동사 앞에서 “집을 지을 것인가, 죄를 지을 것인가”라고 고민했던 그는 불편한 삶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 역시 (견딜 수 있을 정도) 불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 설파한 ‘채나눔’의 건축은 ‘집은 편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내리치는 죽비와도 같았다. 비록 “국어사전에 ‘채나눔’이 등재되는 날을 보고 죽으면 좋겠다”는 농담 같은 소원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지만, 채나눔은 속도와 효율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좀 더 절박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얻어가고 있다.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인천 숭의동성당. 노경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인천 숭의동성당. 노경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전국국어교사모임 살림집. 조재무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전국국어교사모임 살림집. 조재무 제공
강아지도 이름이 있을진대 모든 집에 당호가 있어야 한다고 했던 선생은 자신의 사무실을 ‘지벽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얇은 종이 두 장으로 만들어진 집, 가장 가볍고 깊고 그윽한 건축을 하고 싶다”는 간곡한 소망이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 육신의 굴레를 훨훨 벗어난 이일훈 선생은 이제 곧 ‘지벽간 프로젝트’에 돌입하실 것 같다. 별빛 은은히 잠기는 종이 지붕 아래 단잠을 주무신 뒤 풀잎 기둥에 이슬 맺힐 때쯤 일어나 카메라와 수첩 챙겨 동네 산보에 나서실 거다. 그 어느 골목길에서 반가이 만나는 날, 나도 이렇게 부탁하고 싶다. “이일훈 선생님, 선생님과 집을 짓고 싶습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전국국어교사모임 살림집. 조재무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전국국어교사모임 살림집. 조재무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자비의 침묵 수도원. 진효숙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자비의 침묵 수도원. 진효숙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한국순교자복자성직수도회. 진효숙 제공
이일훈 건축가의 작품. 한국순교자복자성직수도회. 진효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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