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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미술 국가대표’ 선정 잡음…신뢰상실 위기의 한국미술판

등록 2021-07-01 18:23수정 2021-07-02 02:33

[울림과 스밈]
베네치아 한국관 감독 초유의 재심사 사태
지난 2019년 열린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모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지난 2019년 열린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모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한 수도권 예술기관의 수장으로 재임 중인 미술인 ㄱ씨는 최근 또 다른 감투를 맡았다. 세계적인 국제미술제에 나갈 한국 미술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선정위원이었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운영하는 예술기관의 운영위원 ㅇ씨와 교육프로그램 강사 ㅁ씨가 최종 후보 두 사람으로 올라왔다. 그는 선정위원을 계속 맡아야 할까? 맡지 말아야 할까?

지난달, 12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격년제 국제 미술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2022년 한국 국가관 전시 예술감독을 뽑는 과정에서 한 선정위원은 이런 물음 앞에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그는 선정위원을 계속 맡는 쪽을 택하고, 최종 심사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했다. 결국 그의 뜻대로 ㅁ씨가 감독에 적격이란 심사 결과가 채택됐다. 곧 심각한 내부 논란이 일어났다. 이 선정위원의 선택을 문제 삼은 다른 미술인이 “같은 기관에 속한 사람들의 친분 관계를 제척해야 하는 사유를 어겼다”며 지난 29일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에 공식 민원을 제기했다. 이에 심사를 주관한 한국 문화예술위원회는 심사 결과를 백지화하고 이 선정위원을 다른 선정위원으로 대체해 재심사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다음날인 30일 공지했다.

문예위는 지난달 서류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에 오른 4명에 대한 인터뷰 심사까지 모두 진행한 상태였다. 그런데 심사 대상자 4명 중 2명이 선정위원 ㄱ씨와 같은 기관 소속이라는 문제가 민원을 통해 제기되고 공론화되자, 문예위는 이런 재심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여느 비엔날레와 달리 나라별로 국가관 전시를 벌여 자기 나라의 대표 작가를 보내 수상 경쟁을 하는 구도다. 한국관 예술감독은 그해 한국 현대미술의 국가대표가 되는 만큼 큰 주목을 받게 된다. 1995년 한국관이 생긴 뒤로 감독 선정 과정에 뒷말이 불거진 적은 많지만 불공정한 절차가 공식 인정돼 1차 서류심의부터 재심사하게 된 것은 전례가 없었다. ㄱ씨를 뺀 선정위원은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 신정훈 서울대 교수,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윤성천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관, 박두현 문예위 사무처장 직무대행이다. 이들 중 일부는 “심사 과정에서 여러 논란 때문에 부담이 커서 선정위원을 모두 바꿨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사태를 일으킨 ㄱ씨는 “제척 사유에 따른 재심사를 수용했지만 문예위 대응은 과민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후보 모두 내가 속한 기관에서 일하지만, 운영위원 ㅇ씨는 1년에 두번 회의하는 정도이고, ㅁ씨 또한 외래강사일 뿐이다. 앞서 1차에서 거른 다른 후보들도 다 나와 친분 있는 분들이었다. 일이 많다 보니 제척과 관련해 놓친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정위원 중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유일하게 관여한 국제 전시 경험자로서 선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 생각한다”고도 해명했다.

하지만 선정위원 일부를 포함한 다른 미술인들의 평가는 크게 달랐다.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제척 사유이고, 1차 심사 때 제척 관계에 해당하는 내용을 문서에 명기해달라고 분명히 문예위에서 고지했는데도 이를 명기하지 않고 심사에 임한 것은 모종의 의도를 갖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민원을 제기했던 미대 교수 ㅇ씨는 “제척 사유를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한 선정위원의 태도는 명백히 비윤리적이고 공적인 책임의식이 부족한 것”이라며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적인 인맥과 친분 관계로만 움직이는 한국 미술판의 고질적인 치부를 드러낸 사태로 본다”고 말했다.

선정위원이 제척 사유를 눈여겨보지 않고, 문예위가 선정위원과 후보의 관계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문제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건 지금 한국 미술계의 선정 제도에서 공적인 기준에 대한 공감과 신뢰 기반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이번 사태가 극명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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