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기둥과 대들보가 썩어 집이 무너지려 한다. 집이 무너지면 나와 부모, 처자식이 죽는다. 그런데도 서툰 목수에게 맡기면 집이 더 상한다면서 그냥저냥 지내자고 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은 늘 이런 식이라고 지적한다.(<성호사설>, ‘변법’(變法))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늘 진(秦)나라 상앙과 송나라 왕안석을 핑계로 댄다. 상앙은 개혁에 성공해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엄혹했다는 것이고, 왕안석은 추진했던 신법(新法)이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이유다. 이익은 이 반대의 논리에 일단 동의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논리가 도리어 개혁을 미적대는 구실이 되고 있음도 지적한다. 예컨대 남송의 이항(李沆)과 왕단(王旦)은 정권을 잡은 뒤 무조건 ‘안정’만 주장해 작은 개혁이라도 하려고 하면, 즉시 ‘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그 결과 뒷날 무수한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호는 <성호사설>의 ‘관대함과 준엄함(寬猛)’에서 상앙과 왕안석의 개혁은 과정의 적절함을 잃었기에 실패한 것이고, 그래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일 뿐, 개혁의 추진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곧 상앙과 왕안석은 개혁과정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 오류를 저질렀을 뿐이니,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여 개혁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호는 특히 왕안석에 주목한다. 왕안석은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실패로 귀착된 경우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성호는 왕안석은 청렴하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식견이 깊고 분명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왕안석의 신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든 수구 세력은 그 실패를 개혁 자체를 거부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개혁을 하려 들면 ‘왕안석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우겼던 것이다. 성호는 왕안석을 개혁 거부의 명분으로 삼았던 보수파의 여독이 영원히 흘러 퍼져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개탄했다.
연암(燕巖) 박지원 역시 춘추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과 상앙의 공리적, 실용적 학문에 취할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과정록>(過庭錄)). 또한 그들이 인의(仁義)를 배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시대의 군주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암 역시 관중과 상앙을 복권시키려 하였다. 역사적으로 평가할 만한 사업을 이룬 정치인과 학자, 지식인 들은 사실상 관중과 상앙의 방법을 따랐으면서도 남들이 보는 데서는 그들을 배척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성호와 연암이 관중과 상앙, 왕안석을 복권시켰을까? 생각해 보면 왕안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조는 박제가를 두고 ‘왕안석’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조는 그 왕안석의 절실한 개혁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박제가 역시 정조가 자신을 왕안석이라 불렀던 그 말씀이 귀에 남아 있다(呼臣比安石, 玉音猶在耳)고 감격했을 뿐이고, 자신의 개혁책이 실천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았다. 박제가 역시 한심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조선의 비극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개혁이 말로만, 책으로만 이루어졌던 데 있었다. 개혁은 할 수 있을 때 해야만 하는 법이다. 좋은 게 좋다고 시간을 흘려보낼 때가 아닌 것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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