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시절인 1945년 6월 길림시 조선인들의 단체인 ‘길림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연극 <춘수와 같이>에서 가톨릭 신부 역을 맡아 연기하는 김수영. 박수연 제공
김수영은 1944년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이행하던 계절에 길림으로 건너갔다. 길림에는 요식업으로 성공한 이모가 살고 있었고, 그의 가족들도 이미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어머니는 서울에 남아 경기중학교 입시 준비를 하던 아들 김수경을 돌보고 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길림과 경성을 오가며 돈벌이를 했다. 누이 김수명의 기억에 따르면 오빠는 그 어머니를 따라 차가운 겨울 저녁에 길림의 집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당시 서울에는 김수명의 바로 위 오빠 김수경만이 중학 입시를 위해 남아 있었다. 그 위 오빠인 김수강은 그들의 집이 학교 담장에 연결되어 있는 길림제6고에 다니고 있었다. 김수영의 바로 아래 동생인 김수성은 징병 중이었으며, 김수명은 조선 학생이 대부분이었던 동영국민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김수영은 일본에서 돌아와 고모 집에서 기숙하다가 어머니와 함께 길림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1947년에 쓰이고 1948년에 처음 발표된 시 ‘아메리카 타임지’는 김수영의 삶의 경험과 세계 인식을 환기하는 몇 개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뜬금없이 사용된 시구 “지나인의 의복”과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은 그의 만주 이주의 경험과 미국에 대한 태도를 알려주고, 그 의미가 아직도 명쾌하지 않은 “와사의 정치가”에는 외적인 화려함과 내적인 부박함에 휩싸인 당대 정치인들에 대해 그가 택한 어떤 거리감이 있다. 이제 막 해방을 맞은 사람들이 자유 의식에 도취되어 보여준 과잉된 감정과는 다른 정서가 이 시에는 있는 셈이다. 이런, 서정적 정서마저 객관화하는 태도야말로 현실의 이면을 들춰내고 진실을 환기하려는 김수영의 시정신에 핵심적으로 연결될 터이다.
이 시정신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김수영의 천품 이외에도 그의 격렬한 현실 경험이 작용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그의 일본 유학과 만주 이주는 결정적이다. 일본 유학은 그의 자발적 선택이었고, 만주 이주는 패배하듯이 쫓겨간 삶이었다. 상반된 이주 경험이었지만, 두 개의 지역은 그에게 모두 배반의 경험과 함께하는 곳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 배반의 경험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면, 김수영의 삶의 전체는 바로 이 배반의 상처와 돋아난 새살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그가 이 현실을 사랑했다면 그것은 “번개처럼 금이 간 사랑”(‘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랑 속에서 그는 배반을 끌어안았고 배반을 긍정할 수 있었다. “시인은 촌초의 배반자”(‘시인의 정신은 미지’)라는 유명한 진술은 아무 대가 없이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일본 유학은 원래 목적이었던 대학을 포기하고 연극 공부에 주력하게 했던 패배와 기대의 장소였지만, 전쟁이 그것을 모두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귀국한 그가 가담했던 연극은 1944년 이른바 결전기 비상시국의 국민 연극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패배를 선언하고 연극을 포기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연극 무대에 올랐고 일본의 패망 후 귀국했으며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요컨대 그는 그가 살던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돌아오기보다는 바라던 것들을 버려두고 돌아와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우선 처리해야 할 것은 그가 도대체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답변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는 그가 원했던 대로 전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 <춘수와 같이> 기념사진첩 표지. 박수연 제공
그가 해방공간에서 발표한 시편들에는 시적 주체가 드러내는 공통적인 면모가 있는데, 그것은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적 태도이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공자의 생활난’), “나는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와 같은 진술에 드러나듯이, 이 시편들 이외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그는 삶과 세계의 원리 같은 것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봄’에 대한 이런 자기 다짐과도 같은 태도는 그 태도가 없었던 상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전제하는 것이다. 김수영에게는 일본, 만주뿐만 아니라 미국도 바로 보아야 할 대상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좌초를 경험하면서 캘리포니아 태생의 어떤 문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라고 비유했다. 일본과 만주에서의 패배 경험을 그는 미국과 관련해서는 하고 싶지 않았겠다. 여기에는 그가 만주 이주 경험을 ‘어리석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저 만주국 오족협화 시대의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는 경험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다. 미국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에 비유하는 시인의 언어는 그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성찰의 지혜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김수영은 10여년 후 한국문학이 미국 국무성의 식민지문학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기록해두었다.)
연극 <춘수와 같이>가 공연된 만주국 시절 길림공회당 건물(왼쪽 둘째). 박수연 제공
김 수영 가족이 살았던 길림시 강장가에 위치한 송화강 입구. 박수연 제공
이 성찰적 태도가 원인 전부는 아니겠지만, 김수영의 시는 많은 경우 연극적으로 가공된 상황으로 전개된다. 페르소나가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야 한다는 근대 서정시의 어떤 원칙 같은 것을 그의 시는 간단히 넘어버리는데, 시의 극적 효과 요컨대 연극적 요인이 시 구성의 원리로 작용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애써 망각하려 했던 ‘연극’이 그의 내면과 몸에 이미 지울 수 없는 깊이로 새겨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시뿐만 아니라 그의 산문 중에도 어떤 글들은 허구적 상황을 만들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시 ‘아메리카 타임지’의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산문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의 실패한 연애담, ‘어머니를 찾아 북만으로’의 만주 이주 전 경성 생활의 정황 등이 그렇다. 상황을 창작하여 제시하는 이유는 삶의 경험을 합리화하고 극화하는 심리에 연결될 터이다. 그것들은 감추거나 위장하고 싶은 삶의 파편적 에피소드들일 텐데, 김수영의 시는 향후 그런 위장과 허구 지향의 심리를 감추지 않고 폭로하는 쪽으로 쓰인다. 이렇게 시인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사사건건 배반하고 폭로하여 극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를 다시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는 그 언어들의 원천을 그의 연극 공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가 연극 마당에서 활동했던 사실을 직접 알려주는 자료는 만주 이주 시절의 연극 <춘수(春水)와 같이>이다. 종교적 삶과 청춘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는 독일극을 번역해서 당시의 길림시 조선인들의 단체인 ‘길림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이 연극에서 김수영은 가톨릭 신부로 분장해 연기했다. 이 연극은 결전기 태평양전쟁에 대응하려는 만주국 정신교육의 축제 마당에 출품된 협화극이었지만(연극 주도자 임헌태의 회고) 김수영에게는 연극 자체로서 이미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경 학생예술좌 출신의 오해석이 연출을, 임헌태와 김수영이 주연을 맡아 공연된 이 연극은 김수영이 직접 연기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 <춘수와 같이> 공연 기념사진. 아랫줄 맨 오른쪽이 김수영이다. 뒷줄의 일본군 차림 배우들이 눈에 뜨인다. 박수연 제공
연극과도 같았던 만주의 짧은 삶이 일본의 패망과 함께 끝나고, 다시 중국인들에게 쫓기듯이 김수영은 귀국했다. 그의 가족들이 살던 집의 이웃이었던 중국인은 일본인들에 대한 테러로부터 보호해준다며 김수영 집안의 귀국을 만류했지만, 김수영의 어머니는 그 집의 대문을 잠그고 이웃 중국인에게 열쇠를 맡긴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이 살던 길림시 강장가(康庄街)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이 남쪽 끝에 수직으로 흐르는 조선인 거주구역이었고, 지금도 조선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또 <춘수와 같이>가 공연된 길림공회당은 얼마 전까지 ‘길림시 활극단’ 사업장으로 활용되다가 최근에 건물 개보수를 위해 공사 중이다. 길림대가의 동쪽 이면도로인 중경가와 청년로가 교차하는 곳에 공회당이 있다. 김수영 가족의 집이 있었던 강장가에서 도보로 30분 정도의 거리다. 길림공회당 앞쪽으로 있는 남창로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대표적 공자사당인 ‘문묘’가 있어서, 시 ‘공자의 생활난’의 소재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를 상상하게 한다. 김수영은 저 만주의 길림에서 공자의 삶을 상상하고 가톨릭 신부를 연기했으며 송화강변을 걷다가 문득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 운명이 그의 문학에 있다고 상상했다면 그것은 어떤 운명이었을 것인지 우리는 곧 길림 송화강에서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박수연 충남대 교수, 문학평론가
아메리카 타임지(誌)
흘러가는 물결처럼
지나인(支那人)의 의복
나는 또 하나의 해협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
기회와 유적(油滴) 그리고 능금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여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
와사(瓦斯)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또 활자를 본다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을 보고
와사의 정치가들을 응시한다
김수영 시 ‘만주의 여자’ 초고. 김현경 제공
현대문학사 원고지에 김수영이 친필로 쓴 ‘만주의 여자’ 원고. 출처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
<자유신문>(1948.12.25)에 처음 발표되었다가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4)에 재수록된 김수영 시 ‘아메리카 타임지’. 맹문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