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가능성: 무능력의 시대와 가능성의 지평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지음, 이신철 옮김/에코리브르·1만9500원
긍정적인 희망을 담아 “그래, 우린 할 수 있어”라고 외치며 세계 최강국의 권력을 잡았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철학을 “멍청한 짓 하지 마”로 바꾸었다. 전쟁과 테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국가와 민족 정체성에 기반한 인종주의적 움직임이 대두했다. 금융 자본주의의 약탈과 노동 계급의 박탈은 날로 심화되고 기후변화에는 희망적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탈리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미디어 활동가인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72)는 2017년에 내놓은 저작 <미래 가능성>에서 이러한 현재를 ‘무능력의 시대’로 규정한다. 오늘날 “사회적 유기체는 자기의 육체적 에너지를 여전히 보유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적당한 방향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마치 목이 잘린 몸처럼 행동하고 있다.” 앞서 지은이는 정보기술을 장악한 자본주의에 의한 미래의 종언을 다룬 <미래 이후>(2011), ‘연결’된 세대에서의 자살과 죽음을 다룬 <죽음의 스펙터클>(2015)을 펴낸 바 있다. 이번 책에서는 무능력을 열쇳말로 삼아 앞서 제기한 논의들을 다듬고 종합하는 한편, 이를 극복할 ‘가능성’의 탐색에 주된 초점을 맞춘다.
2013년께 라디오 방송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미디어 활동가인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먼저 지은이는 “가능성은 내용이고, 능력은 에너지이며, 권력은 형식”이란 말로 작업의 전체적인 틀을 제시한다. 능력은 우리에게 환경을 변형시킬 수 있는 잠재력, 곧 에너지이다. 권력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형식이다. 이미 현실에 새겨져 있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권력으로 전환하기 위해, 주체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이에 거스르는 권력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현재 우리가 아예 이런 능력을 지닐 수 없는 상태에 처했다고 진단한다. 프랑스의 논쟁적 작가 미셸 우엘벡 등이 이렇듯 깊은 무능력과 복종, 우울만 남은 이 시대의 모습을 드러낸다고도 짚는다.
지은이가 볼 때, 우리가 무능력해진 것은 “사회적 신체가 그 두뇌와의 접촉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이런 상태를 만든 것은 지난 세기에 결정적인 형질 변경을 이뤄낸 자본주의 체제다. 마르크스는 노동 시간을 늘려 잉여 노동을 추출하는 등 ‘형식적’으로 노동을 포섭했던 자본이, 기술적 변화를 도입해 노동 과정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노동을 포섭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지은이는 자본이 여기서 더 나아가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삶 자체를 포섭하고 인지 양식 자체를 바꿔놓는 ‘궁극적’(정신적) 포섭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금융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디지털 네트워크의 발전 등이 이뤄낸 결과다.
이제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신뢰성을 상실했지만 멈출 수 없는 자동 기계”가 되었다. 애초 인간은 타인의 신체라는 물리적 현존과 끊임없이 불규칙한 ‘접속’을 해야 하는 존재였지만, 이제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의미화 과정을 들어내고 이미 체제에 새겨진 특정 교환 양식에 적응하는 ‘연결’만을 허용한다. 금융은 이 같은 연결 논리에 따라서만 효과를 산출하고, 경제학은 이 시스템에 인식적인 우위를 부과한다. 그 결과 “협력하는 두뇌는 집단적 신체를 가지지 못하며, 사적 신체들은 집단적 두뇌를 지니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능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지식과 기술의 생산은 사회의 요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유화한 기업 공간에서 전개되고 이윤 극대화의 경제적 요구에만 반응한다.” 그런데도 성장, 노동, 급여 등 사회적 신체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과거 산업 시대의 기호적인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의지, 특히 민주적 결정 과정이 금융 권력에 맞설 수 없는 이유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네덜란드 아르테즈 예술대학교 누리집 갈무리
지은이는 “미래는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새겨져 있으며, 따라서 해석 과정을 통해 선택 및 추출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 혁명처럼 근대 역사를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행해온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현재 세계를 더듬어 미래로 나아갈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지은이는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강요>에서 언급한 ‘일반 지성’에 주목한다. 마르크스가 ‘일반 지성’을 이야기할 때, “그는 미리 새겨진 디자인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적 프로젝트에 따라 지식의 단편들을 결합하고 있는 지적 노동자들의 사회적 협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일반 지성은 기성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협력을 통해 만들어내야 할 새로운 무엇이란 지적이다.
따라서 압도적인 저 자동 기계는 현재의 착취 시스템이지만 미래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리의 무능력이 머리를 빼앗긴 사회적 신체에서 비롯한다면, 새로운 사회적 두뇌, 곧 지식과 문화의 사회적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현재 자본 축적의 동력으로만 돌아가고 있는 전지구적 기계를 장악해 이를 인간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돌아가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지은이는 “인간의 시간을 노동의 제약으로부터 해방하고 인간의 노동 시간을 기술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사회적 에너지를 경제 분야와 재화의 생산으로부터 돌봄과 자기 배려 및 교육 분야로 옮겨놓기 위한 가능성도 창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68혁명은 “노동 거부와 기술적 혁신” 사이의 동맹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그 뒤 신자유주의 반혁명은 생산성 증가를 노동 시간 단축이 아닌 착취 증대로 향하도록 일반 지성의 힘을 비틀었다. 그 결과 이젠 “경제적 현실보다는 사회적 요구에 토대한 기술 권력에 대한 접근”이란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보인다. 다만 지은이는 우리가 지식의 자율을 지킬 수 있다면 일반 지성의 힘을 재발명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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