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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쓸데없고 난잡한 책” 우정규의 ‘경제야언’

등록 2021-05-21 04:59수정 2021-05-21 10:02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1788년(정조 12) 6월12일 우통례(右通禮) 우정규(禹禎圭)는 상소와 함께 <경제야언>(經濟野言)이란 책을 정조에게 올린다. <경제야언>은 40여 조목으로 구성된 개혁책이었다. 날마다 올라오는, 반대당파를 죽이라는 상소와 차자(箚子)에 진력이 난 정조는 미관말직의 우정규가 올린 개혁책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특별히 활을 하나 하사하고 비변사에 <경제야언>의 시행 가능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경제야언>은 어떤 개혁책을 담고 있었던가. 40여 조목 중 중요한 것을 대충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붕당(朋黨)을 없애는 방법, 부패하지 않는 수령을 선발하는 방법, 과거제도의 개혁, 군대제도와 군정(軍丁)의 선발방법 개혁, 토지의 측량법과 각종 세금 제도 개혁, 도성과 변방의 수비 대책, 화폐제도 개혁, 지역에 따른 인재 차별을 금지하는 방법, 은광(銀鑛)개발 정책. 아주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18세기 후반 조선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를 거의 남김없이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넉달이 지나 비변사는 ‘말이 쓸데없고 난잡하다’는 이유로 <경제야언>의 시행을 거부했다. 채택한 것은 단 두 가지였다. 받아낼 가능성이 없는, 경상도 함안의 오래된 환곡(還穀)을 탕감하는 것과 여성들의 다리머리(가체·加髢)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실제 탕감이 이루어졌고, 후자는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으로 정리되었다. 물론 다리머리는 이 금령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쨌거나 채택된 것은 둘뿐이었다. 우정규가 제시한 40조목의 개혁책은 사실상 폐기되었던 것이다. 비변사는 조목조목 시행 불가능한 근거를 들었고, 정조는 그 근거를 반박하지 않고 수용했다.

근거를 들어 거부하면 그것으로 끝인가? 우정규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정규의 개혁책이 정답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정조와 비변사는 다른 대안을 궁리했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문제를 풀어야 하는 책임 있는 주체는,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우정규가 아니라, 정조와 비변사였다. 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방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우정규만의 일이었을까? 8년 뒤인 1796년(정조 20) 4월25일 화성(華城, 水原) 유학(幼學) 우하영(禹夏永)이 13조목의 개혁책을 올린다. 정조는 우하영을 ‘재능을 품고도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한 선비’로 추켜세우고, 개혁책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고, 곧 시행 가능성을 해당 기관에 검토하게 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검토 결과는 우정규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개혁책이 수용되었더라면, 우하영은 1804년(순조 4) 2월9일 상소와 함께 1400페이지가 넘는 <천일록>(千一錄)을 순조에게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18세기가 되면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며 제도의 개혁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사람들의 열망이 범람했다. 우정규와 우하영, 박제가의 개혁책은 밀실에서 혼자 상상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개혁에 대한 열망을 수렴해낸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왕과 고급관료들은 그 개혁책에 별 반응이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권에 개혁의지가 있는가? 우정규와 우하영, 박제가의 개혁책이 폐기되었던 전철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하기 짝이 없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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