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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인간 중심의 현실정치 벗어나려면

등록 2021-05-07 04:59수정 2021-05-07 11:25

그레이엄 하먼이 분석한 브뤼노 라투르의 ‘객체 정치’
자연-인간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정치적 집합체 탐색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

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갈무리·2만3000원

브뤼노 라투르(74)는 과학기술학(STS)의 관점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해온 근대주의적 이분법을 해체해, 전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다. 다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의 철학, 특히 정치철학은 어떤 것인지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혁명을 말하는 좌파 사상가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부르주아 신자유주의자’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할까?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2014년작)는 ‘사변적 실재론’을 주도해온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53)이 라투르의 정치철학을 탐색한 책이다. 하먼은 2009년에 라투르를 현대 철학의 중추적 인물로 살피는 <네트워크의 군주>를 펴낸 바 있다. 그는 인간뿐 아니라 자연, 사회의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에 집중하는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으로 유명한데, 이는 세상을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와 맺는 관계로 풀이하는 라투르의 핵심 이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과 관련이 깊다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이 책은 두 사상가의 이론적 면모를 동시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선 지은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정치철학 분류법을 제시한다. 근대적 존재론은 이쪽엔 사회가 저쪽엔 자연이 있다고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그렇다면 “정치는 인간사의 참된 본성에 관한 지식에 기반을 둔다”고 보는 입장과, “그런 지식은 존재하지 않기에 지배를 위한 투쟁이 이를 대체한다”고 보는 입장이 나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의 형상에 정치를 정초하는 입장은 ‘진리 정치’라 할 수 있는데, 루소와 마르크스, 최근에는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이 지제크 등이 이런 태도의 좌익을 대변한다. 진리를 소수 철학자들의 비기(秘技)로 보는 플라톤이나 레오 스트라우스 등은 진리 정치의 우익적 흐름이다. 반면 어떤 초월적인 진리 위에 정치를 정초하지 않고 권력의 다툼 그 자체에 집중하는 입장은 ‘권력 정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말한 토머스 홉스, 적과 나를 가르는 것을 정치적인 것의 핵심으로 본 카를 슈미트 등은 권력 정치의 우익적 흐름이다. 정체성 정치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지식인들은 권력 정치의 좌익적 흐름에 위치할 것이다.

지은이는 “라투르가 홉스와 맺은 긴장 관계가 라투르의 정치철학 전체를 견인하는 엔진”이라고 본다. 정의와 힘 사이의 구분, 이를 가를 초월적인 상소 법원 따윈 없이, 세계가 단지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로 이뤄졌다고 본다는 측면에서 라투르의 기본 입장은 홉스에 가장 가깝다는 풀이다. <프랑스의 파스퇴르화>(1984)는 초기 라투르의 이런 면모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저작이다. 그러나 라투르는 1991년께부터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자신의 관심을 “모두를 위한 공동 공간의 취약한 조성”으로 옮긴다. 근대주의적 이분법 자체를 거부하고 그 동안 인식되지 못했던 더 많은 비인간적 존재자를 찾아 발언권을 주고자 하는 자신의 궁극적인 기획에, 현행 정치적 집합체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홉스주의적 권력 정치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정치>(1999)에서 드러나듯,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더 많은 외부의 인간-비인간 존재자를 찾아내어 정치적 집합체에 끌어들이는 것, 곧 ‘사물정치’가 라투르 정치철학의 핵심으로 대두한다.

<존재양식들에 대한 탐구>(2013)에 이르러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각각의 존재양식에 따라 다시 배치하고, 다른 범주들과는 구분되는 정치의 양식을 연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여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박사논문을 지도한 누르츠 마레(영국 워릭대 교수)의 존 듀이와 월트 리프먼에 대한 연구다. 리프먼의 ‘유령 공중’ 개념에 영향을 받은 듀이는, 제대로 모르는 채 모든 쟁점에 간여하는 동일한 익명의 회색 대중 대신 기묘하고 생소하고 복잡한 쟁점을 통해 새로운 공중이 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여기에 영감을 받은 라투르는 “아무 쟁점-객체-사물도 없는 상태에서 정치를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공중들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한 공중을 생성하는 객체들을 마침내 돌아보게 하는 것은 급진적인 의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말한다. 정치를 권력 투쟁이나 언어 게임 같은 인간의 상호작용 영역에서 떼어놓는 대신, 인간과 비인간이 결합하는 다양한 쟁점-객체-사물을 그 중심에 놓으려는 시도다. 라투르의 이런 사유를 도운 마레는 “쟁점이 없다면, 정치도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지은이는 “라투르가 실행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 정치와 권력 정치의 근대주의적 딜레마를 ‘객체 정치’라 일컬을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이를 ‘객체 지향 민주주의’라고도 풀이한다. “정치는 결코 정확히 인식되지 않는 객체들에 의해 촉발된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객체를 중심으로 삼는 정치적 기획에는, 누구도 사물의 깊이를 완전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무지는 모든 인간 행위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는 일관된 경계심이 도사리고 있다. 기후변화나 팬데믹 위기 등 기존의 인식 너머의 사태들을 마주하며 더욱 커지고 있는 현실정치의 무능함은, 어쩌면 근대주의적 이분법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맺음말에서 “라투르의 객체 지향 정치는 어쩌면 좌익 정치보다 더 과감하고 우익 정치보다 더 신중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최근 라투르가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에 맞서 다시금 권력 정치, 특히 카를 슈미트의 노선을 받아들이고 있을 가능성도 짚는다. “(더는 설득할 수 없는) 회의론자를 단적으로 무찔러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인간 종 전체가 위험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태도가 드러난다는 풀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브뤼노 라투르를 현대 철학의 중추로 살핀 &lt;네트워크의 군주&gt;(2009)를 써냈던 그레이엄 하먼은 &lt;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gt;에서 그의 정치철학을 깊이 탐구한다. 미국 남부캘리포니아건축연구소(SCI-Arc) 누리집 갈무리
브뤼노 라투르를 현대 철학의 중추로 살핀 <네트워크의 군주>(2009)를 써냈던 그레이엄 하먼은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에서 그의 정치철학을 깊이 탐구한다. 미국 남부캘리포니아건축연구소(SCI-Arc) 누리집 갈무리

브뤼노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나누는 근대주의적 이분법을 해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브뤼노 라투르 누리집 갈무리.
브뤼노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나누는 근대주의적 이분법을 해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브뤼노 라투르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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