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박제가의 <북학의>가 청(淸)나라를 참고해 조선을 개혁하자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개혁책은 당연히 국가적 차원에서 권력이 동원되어야 실현 가능하다. 그 권력의 정점에 왕이 있으니, 일단 왕의 결심이 필요하다. 왕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정치 집단의 동의도 당연히 따라야 한다. <북학의>는 그런 기회를 가졌던가?
1786년 1월22일 정조는 인정문에서 조참(朝參)을 거행한 뒤 재상과 시종(侍從) 등 고위관료는 개혁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을 자신에게 직접 하고, 중하급 관료는 마음속에 품은 바를 글로 써서 제출하라고 하였다. 이때 중하급 관료 3백여 명이 올린 개혁안을 모은 책이 곧 <병오소회>(丙午所懷)다. ‘소회’는 곧 마음속에 품은 바다.
박제가 역시 자신의 개혁책을 ‘소회’로 써 내었다. ‘소회’에서 박제가는 현재 동쪽으로는 일본, 서쪽으로는 서장(西藏, 티베트), 남쪽으로는 자바(瓜哇), 북쪽으로는 카얼카(喀爾喀, 외몽고 일대)까지 전쟁의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2백 년의 평화가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시기에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회’에서 그는 <북학의>를 요약하면서 파격적인 개혁책을 제출했다. 예컨대 그는 중국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서양 선교사를 초빙해 과학 기술을 배우자고 대담하게 제안했던 것이다.
정조는 모든 사람이 올린 소회에 답했다. 박제가의 소회에 대해서도 당연히 답이 있었다. 그 답은 간단했다. “네가 진달한 여러 조목을 보고 너의 식견과 뜻을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겠는데, 내게는 별 의미가 없어!”라는 말이었다.
1798년 정조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전국에 농서(農書)를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농업에 관한 내용을 뽑고 새로운 사항을 보충해 책자로 엮어 상소문과 함께 올렸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당연히 채택되지 않았다. 개혁책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지금이야 <북학의>를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만, 18세기 후반 이 책은 아무 소용이 없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제가가 소회를 올린 바로 그날 대사헌 김이소(金履素)와 대사간 심풍지(沈豐之)는 북경에서 수입되는 이단서적들(漢譯西洋書, 小說, 小品 등의 책)을 철저히 검열해 막고, 수입한 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아울러 북경에 파견되는 사신단의 구성원들이 중국 지식인과 개별적으로 만나 친분을 쌓고 교유(交遊)하는 것도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정조는 훌륭한 제안이라며 수용하고 시행세칙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박제가가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다면, 정조와 조정의 고위관료들은 폐쇄를 적극 추진했던 것이다. 안으로는 사회가 붕괴되어도 뚜렷하게 개혁하는 바가 없고, 밖으로는 세상이 바뀌는 것을 알고도 스스로 눈을 감아버린 것이었다.
이 나라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란다. 선거 한 번 졌다고 우왕좌왕하지 마시고 근본으로 돌아가시라. <북학의>를 휴지조각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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