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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떨어지는 폭탄 속에 펼쳐지는 첩보 로맨스

등록 2021-04-02 04:59수정 2021-04-02 10:34

[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팔리 들판에서

리스 보엔 지음, 정서진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2021)

편하게 장르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요새 많은 장르 소설은 하나의 장르로 국한할 수 없다. 소위 멀티-장르의 시대, 한 가지 장르 형태로만은 독자를 놀라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장르 소설들이 추구하는 바가 혼종과 다층, 경계 넘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여기에 이 명명의 본연적인 역설이 있다.

<팔리 들판에서>는 이런 예에 걸맞은 소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책은 세계 2차 대전 배경의 첩보 로맨스 소설이다. 헐겁게는 신분 차이가 있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다룬 로맨스 같지만, 세부적인 플롯을 따져 보면 1941년 전시 영국에서 스파이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영상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와 넷플릭스의 <블렛츨리 서클>을 바로 연상할 것이다. 주요 인물인 서턴 가의 다섯 딸의 성격에서 <다운튼 애비>의 분위기를 깊게 느낄 수 있고, 그중에서도 주인공인 레이디 패멀라 ‘패머’ 서턴의 직업이 블렛츨리 파크에서 근무하는 암호 해독가이기 때문이다.

팔리 플레이스의 웨스트햄 경의 딸 패머는 어려서부터 부유한 금융업자의 아들인 제러미 프레스콧을 사랑했기에, 동네 교구 목사의 아들인 벤 크레스웰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불의의 사고로 참전하지 못한 벤은 대신에 ‘비밀리에’ 영국 첩보부 엠아이(MI)5에서 일하고,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팔리 들판에 낙하산 사고로 떨어져 죽은 정체 모를 남자의 비밀을 풀라는 지령을 받는다. 죽은 자가 남긴 것은 1461이라는 숫자가 적힌 흐릿한 사진 한장뿐. 그가 접선하려고 했던 사람은 누구인지?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벤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독일 수용소에서 탈출한 제러미의 귀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패머와 마주친다. 전시의 사교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들 속에서 벤과 패머는 영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사건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팔리 들판에서>는 나름대로 차분한 야심이 있는 소설이다. 1940년대 전시 상황을 재현하고, 풍속 소설적인 인간 관찰을 놓치지 않은 채, 개성 있는 여성 인물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로맨스가 예측 가능하다는 건 단점이 아니고, 이 소설을 좋아할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주어진 단서들이 산만하며, 긴 추리 과정에 비해 우연적인 발견으로 단번에 해결이 된다는 점이 아쉽다.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만들 때, 어쩔 수 없이 놓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놓친 점, 스릴러는 정형적이되 인물은 다채롭다는 것이 이런 소설의 장르적 특성일 수도 있다. 즉, 독자들은 이야기에서 발견한 내용으로 추론하기보다는 이제껏 훈련된 자신의 장르적 지식으로 범인을 맞힐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익숙한 재미가 <팔리 들판에서>를 읽는 이유이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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