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제주의 무덤가를 돌아다니며 동자석을 비롯한 돌문화를 탐구하고 있는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 허호준 기자
“제주도 동자석은 자연환경과 문화환경에서 탄생한 석상입니다. 비록 동자석의 사용자가 양반이나 관료, 지방 토호층이라고 하더라도 제주도 동자석의 미의식은 민중의 생활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주도 동자석은 민중 조각으로서의 독보적인 전통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0년 넘게 제주의 동자석과 돌문화를 조명하고 연구해 온 제주도 민중미술 1세대인 김유정(60) 제주문화연구소장은 31일 동자석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동자석을 비롯해 돌담과 산담(무덤 주위에 쌓는 돌담) 등 제주도의 돌문화에 관한 한 최고 연구자이다. 그가 최근 <제주도 동자석 연구-화산섬 무덤의 꼬마 석상>이라는 동자석 연구서를 냈다.
30여년 연구해온 ‘돌문화’ 권위자
세번째 저서 ‘제주도 동자석 연구’
손에 든 기물·무덤의 관직 정리
“무속·불교·유교·기독교 다 포함”
어릴적부터 돌담 아름다움에 끌려
“땅값 올랐냐는 말만 유행해 걱정”
제주의 동자석들이 손에 들고 있는 각종 기물의 그림. 김유정 소장 제공
김 소장은 이번 책에서 제주도 동자석의 손에 든 기물과 머리 모양, 동자석이 세워진 무덤의 관직을 정리해 냈다. 기물은 동자석의 두 손에 들려 있는 갖가지 도구와 만물을 말한다. 그가 분류한 기물을 보면, 유교적인 것으로는 술잔과 술병, 과일, 창, 곤장, 붓, 숟가락, 젓가락, 향꽂이 등이 있고, 불교적인 것으로는 연꽃을, 기독교적인 것으로는 십자가를 들고 있는 동자석도 있다. 또 무속적인 기물로는 신칼, 부채, 꽃다발, 방망이, 새, 약병, 거울, 목걸이, 나뭇잎 등이 있다. 그가 분류한 동자석의 머리 모양은 양각 댕기 머리, 음각 댕기 머리, 민머리, 쪽 찐 머리 등 모두 23가지다.
그는 제주도 최초의 동자석으로, 조선시대 광해군 때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낸 ‘헌마공신’ 김만일 무덤의 동자석을 꼽는다. 건립 시기로는 무려 163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아울러 바다 건너 다른 지방의 동자석과 제주섬의 동자석이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그는 “육지부 동자석은 화강암이 주류지만, 화산섬 제주도의 동자석은 현무암과 조면암이 주류를 이룬다. 머리 모양도 육지부 동자석은 두 개의 결발(상투를 틀거나 쪽을 한 머리 모양)을 가진 남자아이지만, 제주도는 동남동녀가 무덤을 지키고 있어 상대적으로 여자의 지위가 평등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또 육지부 동자석이 양반 사대부, 벼슬아치 중심의 무덤에 세워지는 반면 제주도에서는 서민들의 무덤에도 세워져 비교적 신분 질서가 자유롭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1990년부터 동자석에 대한 사진을 찍으면서 연구해온 그는 2003년 <아름다운 제주석상 동자석>을 펴냈고, 2012년엔 <제주도 동자석 연구>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김 소장이 이처럼 제주의 ‘돌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돌과의 일상적인 만남이 삶의 일부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돌담은 나의 일상이었어요. 집, 밭, 산(무덤), 해안 모두가 돌담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돌의 나라에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아버지의 친구분들은 돌챙이(석공)였지요.”
제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제주 최초의 헌마공신 김만일의 동자석(1632년). 김유정 소장 제공
돌담은 그의 예술적 눈을 뜨게 한 계기도 됐다. 그는 어릴 때 살았던 집의 돌담이 긴 올래를 통해 친척 집들과 이웃해 있어 둥그렇게 휘어졌고, 돌담의 선이 불규칙하지만 곡선이 주는 자연스러움과 투박한 비정형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밭일을 가보면 계절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농작물들이 거무스름한 밭담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마을 앞바다의 원담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도 생생하다. 내게 돌담의 매력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이전부터 생활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는 “제주도를 구성하는 용암인 현무암은 건축재로써 초가와 성의 축조, 밭담과 산담에 이르는 생산력과 제주인들의 의례 영역을 구축했다. 동자석 등 석상은 종교나 신앙의 이념을 나타내면서 염원과 수호적인 기념물이 되기도 하고, 또 현무암과 조면암으로 만든 일상의 도구들은 삶의 생활 용구가 됐다. 풍토가 환경을 변화시키고, 용암이 섬의 문화를 이끌어갔다”고 말했다.
동자석과 돌담 연구는 특성상 현장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 김 소장은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후손들이 제를 지내다가 동자석 연구를 하는 나를 알아보고 제사 음식을 대접해주기도 했고, 혼자 무덤을 찾아다니면서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산담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귀신을 위로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우리는 모두 ‘제주섬 풍경의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어서 언제, 어떻게, 왜 변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요즘 회자하는 말 중 하나가 ‘땅값 얼마나 올랐느냐’입니다. 땅값이 오른 것을 잘된 일이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밭이나 들판, 야산에 있는 산담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주 동자석을 “천의 얼굴을 가진 대표적인 제주의 석상”이라고 말한 김 소장은 제주의 돌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