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의 철학
한스-게오르크 묄러 지음, 김경희 옮김/이학사·1만8000원
동아시아 문명을 떠받쳐온 핵심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도덕경>은 비밀에 싸인 책이다. 이 텍스트의 수수께끼 같은 내용은 수많은 해석을 낳았다. 그러고도 이 책은 여전히 반쯤만 열려 있다. <도덕경>을 해석의 어둠에서 꺼내 밝은 햇빛 아래 놓을 길은 없을까? 도가철학 전문가 한스-게오르크 묄러(마카오대학 교수)가 쓴 <‘도덕경’의 철학>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이 텍스트의 구조와 내용에 이르는 새로운 해석학의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노장 철학 연구자 김경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지은이는 먼저 <도덕경>이 서론에서 시작해 본론을 거쳐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쓰인 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도덕경>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적인 단편들의 나열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도덕경>을 읽어가는 것이 좋을까? 지은이의 제안은 이 책을 인터넷상에서 발견되는 ‘하이퍼텍스트’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인터넷상의 하이퍼텍스트는 저자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명확한 시작점이 없어서 어떤 항목에서든지 출발할 수 있으며, 링크에 링크가 잇따르면서 여러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지은이는 <도덕경>도 이런 하이퍼텍스트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도덕경>은 1장에서 시작해 마지막 81장에서 끝나는 일직선의 논리적 구축물이 아니라, 단편적인 격언들이 모여 짜인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격언들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은 주제를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이 장에서 저 장으로 건너뛰며 이어진다. 따라서 이 이미지의 연쇄를 따라가며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도덕경>을 읽는 방식이 돼야 한다. 그리하여 통상의 <도덕경> 해설서들이 제1장의 ‘도가도 비상도’에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이 책은 텍스트의 구조를 보여주는 데 길잡이가 될 만한 곳에서 시작한다.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진 전설상의 인물 노자.
지은이가 출발점으로 삼는 곳이 바로 6장이다. ‘곡신불사’(谷神不死)로 시작하는 6장의 내용은 이렇다. “골짜기의 혼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어두운 여성스러움이라고 한다. 어두운 여성스러움의 문, 이것을 일컬어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 이 구절은 여러 은유로 가득 차 있으며 각각의 은유들은 다른 장의 구절들로 이어진다. 여기서 지은이가 먼저 거론하는 것이 ‘골짜기’라는 은유다. 골짜기는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여 등장한다. “얼마나 광대한가! 골짜기처럼.”(15장) “세상의 골짜기가 되어라. 그러면 항구적 효력이 충분히 갖춰질 것이다.”(28장) “큰 효력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닮았다.”(41장) “물이 흐르는 골짜기들은 가득 차 있는 상태로 있으려고 하지 않으니, 고갈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39장)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물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빈터를 가리킨다. 그 골짜기는 산과 비교하면 낮은 쪽에 있으며, 산의 ‘가득 차 있음’과 비교하면 ‘텅 비어 있음’이다. 그 낮은, 비어 있는 넓은 터는 비옥한 생산의 장이다. 골짜기의 ‘텅 비어 있음’은 다른 장들에서 ‘풀무’와 ‘바퀴통’의 이미지로 바뀐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 풀무를 닮지 않았는가.”(5장),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인다. 그것이 텅 비어 있기에 바퀴의 유용함이 있다.”(11장) ‘텅 비어 있음’은 무언가를 산출하는 힘을 지녔다. “골짜기는 생명의 지칠 줄 모르는 원천이며, 풀무와 바퀴통은 지속적 운동의 지칠 줄 모르는 중심이다.”
이 골짜기 이미지가 등장하는 구절들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이 물 또는 강의 이미지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품고 키워낸다. 이 이미지는 다시 ‘여성스러운 것’으로 이어진다. “남성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여성스러운 것을 지켜라. 세상의 강이 되어라.”(28장) 강이 아래로 흐르듯 여성스러운 것도 아래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도덕경>에서는 낮은 곳에 있는 것이 높은 곳에 있는 것보다 더 위세가 있고 힘도 더 세다.” 마찬가지로 ‘뿌리’도 낮은 곳에, 어두운 곳에 감춰져 있지만 생명을 키워낸다. 뿌리는 식물의 생명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어두운 힘’이다. 이렇게 <도덕경>은 텅 비어 있음과 가득 차 있음, 낮음과 높음,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음과 양이라는 두 대립하는 것의 통일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도’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도’란 대립하는 것들의 통일적 질서다. 이 대립하는 것들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낮은 것, 여성적인 것, 텅 비어 있는 것’이다. ‘텅 빔’에서 ‘가득 참’이, ‘없음’에서 ‘있음’이 나온다. 이 도의 질서는 생산하고 창출하는 힘 곧 효력을 지닌다. 그것이 바로 ‘덕’이다. 노자의 텍스트가 도와 덕에 관한 경전, ‘도덕경’으로 불리는 이유다.
우주 만물에 편재하는 도의 질서는 <도덕경>의 정치학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물론 우주 만물을 관장하는 도가 언제나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그러하게’ 곧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하늘과 땅은 이따금 오작동한다. 홍수나 폭풍 같은 자연재해는 이 질서가 일시적으로 깨졌음을 보여준다. 더 주목할 것은 인간 사회야말로 우주 자연 내부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영역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어떻게 유지하고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이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바로 이런 이유로 <도덕경>의 많은 내용이 통치자의 리더십을 다룬다. 그 통치자가 바로 ‘성인-군주’다. 이 성인-군주야말로 도의 질서를 따르는 ‘도의 대리인’이다. 성인-군주는 물처럼 가장 낮은 곳에 처하고 자신의 마음을 ‘텅 비게 하여’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성인-군주는 ‘비어 있는 중심’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위’의 태도다. “줄이고 더 줄여라.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무위)에 도달하라.”(48장)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면, 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이 무위의 리더십이 바로 <도덕경>이 성인-군주에게 요구하는 통치술이다. 이렇게 드러내지 않고 나서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자, 다시 말해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 자야말로 가장 군주다운 군주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 것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지배한다는 ‘도의 역설’이 정치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성립하는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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