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 1919, 1949, 1989
백영서 지음/창비·2만원
중국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에도 견해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문제다. 중국현대사 학자 백영서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중국 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 1919, 1949, 1989>는 지은이가 수십 년 동안 이 분야를 연구해 세운 관점으로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의 관점을 ‘100년의 변혁’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이때 ‘변혁’이란 “특정 모델로 가는 직선적 진화 과정이 아니라,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무엇인가로 가는 변화”를 가리킨다. 다소 모호한 이 말의 함의를 명료히 하자면, 지은이가 이 책 서술의 기본 틀로 삼는 ‘이중과제론’, 더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 담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중과제론은 근대의 특성을 긍정적 가치로 보는 근대주의와 근대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탈근대주의의 이분법을 넘어서 제3의 시각으로 근대를 이해하는 담론이다. 근대의 특성에는 성취해야 할 것과 부정해야 할 것이 함께 들어 있으므로, 근대에 적응하려는 노력과 근대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중과제론의 핵심 논지다.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라는 과제를 ‘이중적인 단일기획’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중국 현대사를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을 향한 ‘100년의 변혁’으로 고찰하는 것이 이 책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의 서술 방식이다. 지은이는 중국의 100년 현대사를 연대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그 역사 전개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세 시기를 부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5·4운동이 일어난 191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 1949년, 그리고 톈안먼(천안문) 사건이 벌어진 1989년을 중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이 세 시기를 이정표로 삼아 각각의 시기마다 중국 인민의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노력이 어떤 방식으로 실행됐는지를 추적한다.
1919년 5월4일 톈안먼 광장에서 부패한 베이징 군벌 정권의 반민족적 외교정책에서 항거해 일어난 5·4운동.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조망하는 세 사건이 모두 톈안먼 광장을 중심 혹은 거점으로 삼아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1919년 일어난 5·4운동은 톈안먼을 저항의 상징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이 발생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당시 베이징 군벌 정권의 반민족적 외교정책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뒤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중국 민중은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 지역 이권을 되돌려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베이징 정권은 앞서 맺은 비밀조약에 따라 이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터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군벌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5·4운동의 시작이었다. 시위를 이끈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첫날 시위가 폭력양상을 띠자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학생들을 체포했는데,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 각계 민중 운동으로 번졌다. 군벌 정부는 마지못해 외교 실책을 물어 관료 셋을 파면했다. 학생이 중심이 되고 전국의 각계 민중이 연대해 정부의 굴복을 이끌어낸 것이다. 여기서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학생들의 변화다. 이 승리의 경험 이후 대학생들의 내면에서 ‘사회변혁적 자아’가 형성되고, 변혁의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직업혁명가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이 혁명가들이 1921년 중국공산당을 결성하고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5·4운동을 이끈 ‘신청년’이 중국공산당의 주도 세력이 되고 ‘이중과제’ 수행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1949년 10월1일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는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
이 책이 두 번째 중대한 변곡점으로 꼽는 것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신민주주의론’과 ‘혼합경제체제’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축하 행사에는 공산당 간부들뿐만 아니라 ‘민주파’ 지도자들도 함께했다. 그때 선포된 것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 ‘인민공화국’이었다. 국기인 오성홍기에 그려진 큰 별은 공산당, 그 둘레의 작은 별 네 개는 노동자·농민·소부르주아지·민족부르주아지를 상징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민주적 계급연합 국가’를 지향한다는 뜻이 담겼다. 마오쩌둥이 제창한 ‘신민주주의’는 그런 의미의 인민민주주의였다. 이 시기에 새 중국이 지향한 경제체제도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섞인 ‘혼합경제체제’였다. 혼합경제를 기반으로 삼아 계급연합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연다는 것이 건국 초기의 구상이었다. 말하자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전망을 중국 지도부가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 중국이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서 완전히 배제된 뒤, 연합정부와 혼합경제가 패퇴해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단일 과제로 해소되고 말았다. 또 이때부터 중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성격에서 ‘해방적 측면’보다는 ‘억압적 측면’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1989년 봄 톈안먼 시위가 한창이던 때 톈안먼 광장에 대학생들이 세운 ‘민주의 신’ 상. 창비 제공
1989년 봄의 톈안먼 사건은 그해 4월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타계에 대한 추도 분위기에서 시작돼 6월4일 계엄군의 시위대 강제해산으로 끝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이들은 5·4운동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의 대학생들이었다. 시위가 고조되던 시기에 열린 5·4운동 70돌 기념식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5·4운동 이래 최대의 애국운동”이라고 선언했다. 시위 말기인 5월30일에는 ‘민주의 신’ 상을 제막한 뒤 “민주의 신! 70년 전 우리의 선배들은 일찍이 너의 이름을 높이 불렀다”고 ‘민주의 신 선언’을 낭독했다. 지은이는 톈안먼 사건을 중국 지도부의 개혁·개방 추진 이후 다시 불거진 ‘이중과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다. 개혁·개방 뒤 ‘근대적응’ 과정에서 청년·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 서구를 모델로 한 근대성 지표들을 추종하려는 욕구가 급상승했고, 여기에 중국혁명의 전통에서 나온 ‘사회주의적 민주’ 곧 ‘근대극복’에 대한 열망이 함께 분출하며 일어난 것이 톈안먼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 사건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수행할 주체가 잠시 나타난 순간, ‘군중자치의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지은이는 톈안먼 사건에 깃든 이 이중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 나아가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 중국 인민의 민주적 참여가 얼마나 보장되느냐에 중국공산당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전망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