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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죽은 자의 눈에 비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등록 2021-01-01 04:59수정 2021-01-01 10:31

[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열린책들(2020)

흔히 장난스레 묻는 말로 “A랑 B랑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거야?”라는 것이 있다. 누가 마음에 더 가까운지 시험해보자는 의도를 담은 물음이다. 이 질문이 성립하는 건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나와 가까운 사람을 구하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을 남보다 먼저 구하는 행동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래도 되는 걸까?

소설 <한순간에>는 나는 그럭저럭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열여섯 살의 소녀 핀은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와 함께 큰 고민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사고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캘리포니아 날씨치고는 흐린 날, 핀은 가족 및 친구들과 스키여행을 떠난다. 산의 날씨는 예측할 수 없어 금세 눈이 내리고, 핀의 아빠가 몰던 캠핑카는 갑자기 나타난 사슴을 피하려다가 가드레일을 받고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핀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만, 영혼인 채로 남은 이들이 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한순간에>는 죽은 자의 눈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바라보는 재난과 후일담 소설이다. 온몸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죽은 딸이 입은 옷과 장화를 벗긴 엄마는 그것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인다. 딸의 친구인 이웃집 아이에게, 아니면 친하게 지내던 가족의 다른 딸에게 줘야 하나? 생존의 위기에서 다른 사람의 옷을 빼앗아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구하려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나? 조난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며 삶을 복구해야 한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삶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경험을 묘사한다. 소설 속 사람들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대체로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 행동에 따라 그들의 진정한 인간성이 드러나고 만다. 핀의 친구이자 생존자인 모는 그날 사고에서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고 싶다. “사실을 제일 많이 왜곡하는 사람들이 고통은 제일 적게 받는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재난의 진실을 알아내고자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신경 쓰이는 마음이 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순간에>가 슬픔과 죄책감만이 있는 소설은 아니다. 우연히 차를 같이 탄 청년이 다른 사람을 구하고, 길에서 스친 낯선 사람이 고통에 빠진 이에게 친절한 말을 건넨다. 피해자는 나보다 약한 존재를 돌보면서 상처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을 비극이 아니라 행복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영혼은 떠날 수 있다. 사고는 한순간이지만, 회복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과정이다. 그러나 노력하는 이는 평안과 성장을 결국에는 얻을 수 있다. 이 재난의 시기를 함께 지나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약속이 여기에 있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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